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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월드컵 개막전을 가다]푸틴의 과시, 체포, 진압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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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첫 승부의 마지막은 역설적으로 아름답기만 했다. 러시아 미드필더 알렉산드르 골로빈(32·CSKA 모스크바)이 종료 직전 오른발로 감아찬 프리킥이 골문 구석에 꽂히자 7만8011명의 관중은 함성을 내질렀다.

러시아 선수들이 개막전 5-0 대승에 환호하며 그라운드를 휘젓는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은 그대로 드러누워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 전광판에선 ‘21세기판 차르’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66)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위로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2018 러시아월드컵 개막전이 열린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은 마치 옛 로마 시절의 콜로세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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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차르의 대관식

15일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맞대결은 ‘러시아의 힘’을 과시한 일방적인 경기였다. 월드컵 본선 32개국 중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가장 낮은 러시아(70위)는 이날 사우디(67위)를 경기 내내 괴롭혔고, 결국 5-0 대승을 거두면서 올해 첫 A매치 승리를 월드컵 개막전으로 장식했다. 러시아가 월드컵 무대에서 승리한 것은 2002 한·일월드컵 이후 16년 만이다. 또 이날 승리로 개최국은 개막전에서 패배하지 않는다는 징크스도 지켰다. 반면 사우디는 16강에 올랐던 1994 미국월드컵 이후 인연이 없는 월드컵 승리를 다음 경기로 미뤄야 했다.

러시아에 이번 대회, 특히 개막전은 벼르고 벼른 기회였다.

푸틴 대통령은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논란에 이어 지난 3월 영국에서 발생한 전직 러시아 스파이 독극물 살해 시도 배후로 지목돼 곤혹을 치렀다. 그러나 월드컵을 계기로 지구촌 외교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거꾸로 러시아의 힘을 세계로 과시하는 세리머니로 이용했다. 옛 소련 국가들과 중동 등 제3세계 정상이 운집한 가운데 러시아의 골이 터질 때면 득점을 넣은 선수 만큼이나 푸틴의 얼굴이 자주 전광판에 비춰졌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 중인 스타니슬라프 체르체소프 러시아 감독이 “푸틴 대통령에게 걸려온 전화”라며 취재진에 양해를 구한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인하는 장면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포츠와 정치는 섞지 않을 것”이라던 그의 약속은 첫 경기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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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최고의 잔치는 재확인

입맛을 껄끄럽게 만들었던 대관식과 달리 개막전 현장의 열기는 지구촌 최고의 잔치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았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선 잘 느껴지지 않았던 열기가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선 실감이 났다. 러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적백청 삼색을 얼굴에 물들인 사람이 가장 많았지만, 곳곳에 흰 아랍 전통 의상을 입은 사우디 팬들도 눈에 띄었다. 특히 사우디 여성이 개막전을 관전한 것은 이번 대회가 처음이다. 중남미 국가인 멕시코와 브라질, 페루 등에서 온 사람들도 저마다의 응원가를 부르며 월드컵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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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안에서도 열기는 뜨거웠다. 영국 출신의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가 개막식 공연 도중 중지를 들어올렸다 전격 체포되는 해프닝을 일으켰지만 개막식의 흥을 돋구는 역할은 제대로 해냈다. 두 차례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축구스타 호나우두가 개막식에 등장했을 땐 모처럼 관중의 관심이 정치가 아닌 축구로 돌아왔다. 러시아 관중은 러시아월드컵 1호 득점의 주인공인 유리 가진스키(크라스노다르)나 멀티골을 넣은 데니스 체리셰프(비야레알)이 골 폭죽을 쏘아올릴 때마다 쉴새없이 파도타기를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관중석에서 ‘별’을 봤다는 제보도 줄기차게 쏟아졌다. 콜롬비아 축구전설인 카를로스 발데라마와 웨일스가 자랑하는 라이언 긱스, 영국 최고의 골잡이였던 앨런 시어러 등이 칼럼니스트와 해설자로 총출동했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견인한 안정환과 이영표, 박지성도 해설자로 등장했다. 특히 2008년 5월 이 곳에서 열린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출전 명단에 제외됐던 박지성은 10년 만에 처음 해설자로 데뷔하면서 악연을 풀어냈다. 박지성은 “경기장이 당시와는 참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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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끝은 진압작전

개막전이 끝난 뒤에도 축제는 이어졌다. 원하던 대승을 거둔 러시아인들은 나무로 만든 전통숟가락 로쉬카를 부딪치며 노래를 불렀고, 사우디인들은 조용히 기념 사진을 찍으며 패배를 위로했다. 멕시코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개막전에서 승리한 것처럼 레닌 동상을 둘러싼 채 춤을 췄다. 멕시코인 여성 코리는 “멕시코는 언제나 흥겹다”며 “월드컵 개막전을 두 나라만 즐기라는 법이 있느냐”며 웃었다.

그러나 그 축제는 진압작전을 벌이는 것처럼 도열한 군 병력의 눈총 속에 조용히 막을 내렸다. 개막전을 즐겼던 이들은 술잔을 기울여 흥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일부 식당과 술집 외에는 주류 판매를 금지해 공산국가의 이면을 재확인했다. 한 자원봉사자는 “오늘 모스크바에서 허락된 술은 무알콜 맥주일 뿐”이라며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조용히 들어가라”고 귀띔했다.

<모스크바 |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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