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비치는 평소답지 않은 범실을 난발했다. 정현은 날카로운 스트로크로 조코비치를 전후좌우로 흔들었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 중에선 역사상 유일하게 두 차례(1962·1969년) 캘린더 그랜드 슬램(한 해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을 달성한 로드 레이버(호주·80)도 있었다. 정현과 조코비치의 경기가 열린 곳은 레이버의 이름을 딴 호주오픈 센터코트(로드 레이버 아레나)였다.
조코비치가 정현을 추격했지만 68분 만에 1세트는 타이브레이크 끝에 정현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조코비치는 메디컬 타임아웃을 부르며 2세트를 새롭게 출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61분 동안의 혈투 끝에 정현은 다시 조코비치의 추격을 뿌리쳤다. 게임 스코어 7-5로 정현이 2세트마저 가져갔다. 2세트가 끝난 뒤 정현은 손가락으로 코트 바닥을 가리켰다. 흔히 축구 선수들이 ‘여기는 내 구역이다’는 의미로 하는 세리머니다.
3세트에 들어가면서 조코비치는 다급해졌다. 그의 코치이자 전 세계 1위였던 안드레 애거시(미국)의 얼굴도 굳어졌다. 정현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누가 도전자이고 챔피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3세트도 타이브레이크까지 이어졌지만 정현은 무실세트 승리로 경기를 마쳤다. 로드 레이버 아레나는 새로 등장한 별을 향한 환호성으로 가득찼다. 정현은 그의 아버지, 어머니, 형이 앉아 있는 플레이어 박스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2년 전 호주오픈 1라운드에서 정현은 경기 시작 1시간55분 만에 조코비치에 0대3으로 패했다. 하지만 정확히 2년이 지난 뒤 조코비치는 물론 정현도 전혀 달라져 있었다. 정현은 지난해 11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이탈리아) 단식에서 첫 투어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평소 약점으로 지적됐던 포핸드와 서브도 개선했다. 특히 올해 초부터 네빌 고드윈(43·남아공) 코치와 함께하며 실력이 크게 늘었다는 평가다. 고드윈 코치는 지난해 US오픈 준우승자 케빈 앤더슨(12위·남아공)을 지도한 코치로 2017시즌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올해의 코치’에 선정됐다. 박용국 NH농협은행 스포츠단장은 “정현이 서브를 넣을 때 이전보다 몸을 20도가량 더 비틀며 파워를 늘린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정현이 테니스를 시작한 건 좋지 않은 시력 때문이었다. 유치원 때 눈을 계속 찡그려 안과에 가보니 심각한 약시라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눈이 편안해지는 초록색을 많이 보는 게 좋겠다고 권고했다고 한다. 정현의 부모는 테니스를 떠올렸다. 실업 테니스 선수였던 그의 아버지 정석진(52)씨가 녹색 테니스 코트에서 뛰놀게 하기 위해 아들에게 테니스 라켓을 쥐여준 것이다. 그의 형 정홍(25)도 실업 테니스 선수로 뛰고 있다.
정현은 일찌감치 이형택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7세였던 2013년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 준우승을 차지하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복식에선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결국 호주오픈 8강 진출에 성공하며 이형택을 넘어 한국 테니스사를 새로 작성했다.
[석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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