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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를 뼈 '이름' 찾아줄 때… 가슴이 벅찹니다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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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를 뼈 '이름' 찾아줄 때… 가슴이 벅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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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국방부 실종자 확인기관, 한국인 첫 '뼈 박사' 진주현]

한국전·베트남전 등서 전사한 美軍 유해 발굴해 신원 분석
"18살 등 꽃다운 젊은이 많아… 하루 몇번씩 눈시울 뜨거워져"
2013년 12월 새벽. 미국 LA공항 활주로를 94세 흑인 할머니가 천천히 걸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병사 넷이 성조기로 덮인 관을 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한국전에 참전했다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에서 전사한 남편 조지프 갠트 중사와의 63년 만의 재회. 그 사이 백발이 된 아내는 "조지프는 누구보다 멋진 남자였고 나는 평생을 그의 아내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웃는 입매가 유달리 시원한 진주현 박사는“미군 유해 발굴 작업은 정글 숲에서 열대 벌레들과 싸우며 땅을 파는 일이지만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 싶은 소망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웃는 입매가 유달리 시원한 진주현 박사는“미군 유해 발굴 작업은 정글 숲에서 열대 벌레들과 싸우며 땅을 파는 일이지만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 싶은 소망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TV로 이 만남을 지켜보던 진주현(37) 박사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조지프 갠트 중사의 유해를 분석하는 작업을 자신의 팀에서 했기 때문이다. 미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기관(DPAA)의 인류학 감식연구소가 그녀의 일터. 6년 전 첫 한국인 연구원으로 들어간 진씨는 한국전, 베트남전,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전사한 미군(美軍)들 유해를 찾아 베트남 정글부터 아프리카 사막까지 누비는 인류학 박사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유해를 발굴해 뼈를 맞추고 DNA를 분석한 뒤 마침내 '이름'을 붙여주지요. 그 유해가 가족 품에 안길 때 저 역시 기뻐서 같이 웁니다."

지금은 'K208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북한에서 208개 상자에 담아 송환한 미군 유해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꽃다운 나이에 내 조국을 지켜주려다 스러져간 젊은이들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청천강 전투에서 실종됐던 열여덟 살 렐란드 스미스 상병을 비롯해 지난 3년간 신원을 확인한 유해가 151구. "스미스 상병의 두 여동생이 기억나요. 큰오빠를 찾기 위해 저희 기관에서 1년에 두 번 하는 유족 세미나를 꼬박 찾아왔지요. 앳된 미소를 띤 오빠의 흑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서."

진 박사가 'K208 프로젝트'를 "운명처럼" 느끼는 건 이북에서 내려온 조부모 때문이기도 하다. "흥남철수 때 미군함을 타고 남쪽으로 오셨어요. 영화 '국제시장'을 제가 사는 하와이에서도 상영했는데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라 영화 시작해 끝날 때까지 울었지요. 북한에서 송환된 유해의 절반 이상이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이에요. 그들은 죽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사셨지요. 그래서 더 열정이 솟나 봅니다."

한국전 유해 발굴을 담당한 진주현 박사는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도 협업한다. /푸른숲 제공

한국전 유해 발굴을 담당한 진주현 박사는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도 협업한다. /푸른숲 제공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 다니다 '뼈'와 인연을 맺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최초의 인간 루시'를 읽고 나서다. 320만년 전 에티오피아에 살던 키 110㎝의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남긴 뼈에 관한 이야기. "루시의 뼈는, 인간을 다른 영장류와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 두뇌용량이 아니라 '직립보행'이란 사실을 알려준 일대 사건이었죠.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미술사에서 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스탠퍼드대학에서 인류학 석사를,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속한 인류학 감식연구소는 역사학자, 고고학자, 유전학자, 법의학자 등 400여 명이 모여 있다. "유해를 찾지 못한 미군 전사자가 베트남전쟁에서 1600명, 6·25전쟁에서 7900명이에요. 세월이 저렇게 흘렀는데 자국민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국가의 열정, 국민의 합의가 놀랍고 부러울 따름입니다."


최근엔 그간의 현장 경험과 뼈에 관한 다채로운 지식을 담아 '뼈가 들려준 이야기'(푸른숲)를 출간했다. "뼈를 터부시하는 한국 사회에 뼈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싶었어요. 문화재 발굴 현장만 해도 토기가 나오면 보물단지 다루듯 하는데 뼈에는 시큰둥하잖아요. 뼈를 모르고는 과학수사도 할 수 없지요.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만 뼈 3만3000구가 있어요. 과학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가족들 걱정이 많겠다고 하자, 하와이대 인류학 교수인 남편 얘기를 했다. "재미교포인데, '쏘 쿠울~'한 남자죠. 지난 여름 베트남 발굴 현장으로 떠나면서 이번엔 헬기도 타야 한다고 했더니 걱정은커녕 '사진 많이 찍어와' 하더라고요(웃음)."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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