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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철의 링딩동] 광복 70년 프로복싱 명승부의 산실 ‘한일전’ <하>

헤럴드경제 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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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철의 링딩동] 광복 70년 프로복싱 명승부의 산실 ‘한일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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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한일 간 세계타이틀매치에서는 수많은 명승부가 펼쳐졌다. 한 경기, 한 경기가 모두 소중한 자산으로 남겨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복싱 팬들의 뇌리에 가장 많이 각인된 명승부 7경기를 선정했다.

<7위> 최용수 12R무승부 하타케야마 다카노리 1차전: WBA Jr.라이트급 1997/10/5 도쿄

처절한 사투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최용수(오른쪽)와 숙적 하타케야마의 첫 대결.

처절한 사투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최용수(오른쪽)와 숙적 하타케야마의 첫 대결.


1995년 10월 동양챔피언 최용수는 아르헨티나에서 홈 링의 빅토르 우고 파스를 맞아 통렬한 10회 TKO승을 거두고 WBA Jr.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56승 1패 1무의 상대를 적지에서 일방적으로 꺾고 마의 Jr.라이트급을 정복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최용수는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훨씬 강한 복서였다. 일본의 기대주 미타니 야마토를 상대로 한 두 번의 원정 방어전, 두 번의 선제 다운을 빼앗기고 8회에서 역전 KO승을 거둔 올란도 소토와의 2차 방어전, ‘몽골의 복싱영웅’ 라크바와의 치열한 난타전 승리 등을 통해 1990년대 한국 프로복싱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최용수는 1997년 10월 5일 일본에서 강력한 도전자 하타케야마 다카노리를 상대로 6차 방어전에 나서게 된다. 20전 전승(16KO)의 동양챔피언인 도전자는 한국 선수를 상대로 6전 6KO승을 거둔 국내 복서 킬러였다. 가냘퍼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터프한 파이팅을 펼치는 하타케야마는 국내에서 와룡프로모션을 이끌던 유화룡 씨가 도일하여 신인 때부터 키워낸 선수로 스텝이 많은 일본 스타일이 아닌 한국형 파이터에 가까웠다.

초반부터 백병전을 방불케 하는 일진일퇴의 난타전이 펼쳐졌고 주도권을 빼앗긴 최용수는 4회부터 반격에 나서 포인트를 만회해나갔다. 치열하게 치고받으면서도 승부의 추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명승부가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계속되었다. 1만 명의 관중이 기립한 도쿄의 국기관은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최종 점수는 116-114, 114-116, 114-114로 1-1 무승부. 3심 모두 10-9로 채점한 12회를 따내지 못했다면 타이틀은 날아갈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기의 승패를 떠나서 두 선수의 파이팅은 복싱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고 무승부로 6차 방어에 성공했지만 홈 링이었다면 챔피언의 승리가 무방했을 경기였다. 11개월 후에 벌어진 2차전 역시 1차전과 비슷한 양상의 혈전이 12라운드 내내 펼쳐졌고, 1차전보다 좀 더 우세한 경기를 했다는 평가였음에도 판정은 도전자에게 주어져 최용수는 8차 방어에서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6위> 장정구 8RTKO승 오하시 히데유키 2차전: WBC L플라이급 1988/6/27 도쿄

첫 해외원정경기에서 15차 방어에 성공한 장정구.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세계타이틀매치 승리였다.

첫 해외원정경기에서 15차 방어에 성공한 장정구.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세계타이틀매치 승리였다.


1986년 12월 장정구의 11차 방어전 상대로 내한했던 오하시 히데유키의 전적은 6전 5승 1패에 불과했다. 7전만의 세계타이틀매치는 일본 복싱 역사상 최단 전적의 도전 기록이었고 그가 ‘1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복서’라는 칭송을 받던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장정구의 5차 방어 상대였던 구라모치 다다시는 12라운드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다운조차 허용하지 않고 12라운드 판정까지 버텨냈다. 그런 터프가이를 오하시가 프로데뷔 3전만에 1R에서 세 번 다운시키고 녹아웃시키자 일본 복싱계는 술렁였다. 오하시의 펀치 파워가 동급 최상위권으로 평가될 만큼 묵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전의 전적으로 장정구의 아성을 넘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송이 도전자를 끊임없이 난타한 챔피언은 어린 아이 손목 비틀 듯 5회에서 승부를 끝장내버렸다.

그리고 1년 6개월 뒤 유명우에게 도전했던 키유나 도모히로와 일본 타이틀매치를 겸한 도전자결정전에서 승리한 오하시는 다시 한 번 장정구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이번엔 원정 도전이 아닌 홈 링에서의 도전이었다. 15차 방어전에 나선 장정구는 업그레이드된 오하시를 맞아 최초의 원정 방어전을 벌이기 위해 도일했다. 결과는 8회 TKO승. 8회까지 무려 7번의 다운을 빼앗아낸 장정구가 첫 해외 원정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외관상 기록만 놓고 보면 굉장히 손쉬운 경기로 볼 수도 있으나 최초의 KO패를 당할 뻔한 위기를 극복해낸 값진 재역전승이었다. 1라운드부터 도전자를 몰아붙인 장정구는 3회에서 왼손 훅과 오른손 어퍼를 도전자의 턱에 적중시켜 세 차례의 다운을 빼앗아냈다. 1차전보다 쉽게 경기의 마무리가 예상되던 순간 공격만을 퍼붓던 챔피언의 안면에 도전자의 그림 같은 라이트 카운터블로우가 터지며 순식간에 경기가 역전된다. 프로데뷔 후 장정구가 허용한 가장 위력적인 펀치였다. 충분한 연습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바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남은 시간은 20여 초. 웬만한 선수였다면 쓰러졌을 법한 그로기에서도 챔피언은 침착하게 더킹과 위빙, 클린치로 라운드 종료까지 버텨냈다. 이후 기세가 오른 오하시는 4, 5라운드에서 챔피언을 압박해왔고 장정구는 6회가 되어서야 제 페이스를 찾는다. 결국 7회에 두 번, 8회에도 두 번 더 오하시를 다운시키자 카를로스 파딜랴 주심은 경기를 스톱시켰다. ‘위대한 복서’ 장정구가 거둔 세계타이틀전의 마지막 승리였다. 오하시는 장정구와의 2연전 패배를 밑거름 삼아 후일 WBA WBC 양대기구 세계챔피언으로 등극하게 된다.

<5위> 박찬영 11RTKO승 무구루마 다쿠야 : WBA 밴텀급 1987/5/24 오사카

스피디한 연타로 무구루마에게 무수한 펀치 세례를 쏟아 부은 박찬영(오른쪽).

스피디한 연타로 무구루마에게 무수한 펀치 세례를 쏟아 부은 박찬영(오른쪽).


남미의 세력이 주도하는 WBA(베네수엘라)와 WBC(멕시코)에 불만을 품은 미국에서는 새롭게 세계기구의 설립을 시도한다. 미국이 주체가 되어 USBAI에서 명칭을 바꿔 출범한 제3의 단체 IBF는 1983년부터 체급별 초대챔피언 결정전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거행된 1983년 12월 4일 서성인과 보비 베르나의 IBF Jr.페더급 타이틀매치는 IBF 전 체급에 걸쳐 최초의 세계타이틀매치다. 이후 국내에서는 유망 선수들이 대거 IBF 타이틀전에 출전하면서 엄청난 흥행몰이가 되긴 했지만 이는 챔피언의 양산에 따른 가치 하락이라는 결과를 초래했고, 장기적으로는 복싱의 인기가 떨어지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1984년부터 IBF의 세계타이틀전이 급속하게 늘어난 반면 기존 양대 기구였던 WBA와 WBC는 1984년 문태진(WBA Jr.라이트급) 1명, 1985년 이승훈(WBA Jr.페더급), 이동춘(WBA Jr.밴텀급), 최문진(WBA Jr.플라이급), 유명우(WBA Jr.플라이급), 윤석환(WBC S플라이급) 등 5명만이 도전했을 뿐이고 1986년에는 단 한 명도 양대 기구 타이틀에 도전하지 않았다. WBA와 WBC는 장정구와 유명우의 방어전만이 거듭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7년 5월 밴텀급 1위 박찬영이 WBA 타이틀에 지명 도전했고 챔피언은 오사카의 돌주먹 무구루마 다쿠야였다. 완전히 대조되는 복싱스타일을 지닌 두 선수 중 파워는 챔피언이, 스피드는 도전자가 각각 월등히 앞서 있었다. 17개월 만에 열린 한국 복서의 WBA 타이틀 도전은 한낮에 생중계되었고 박찬영은 무시무시한 펀치를 지닌 챔피언의 강타를 빠른 스피드와 테크닉으로 시종 무력하게 만들면서 일방적으로 챔피언을 두들겨댔다. 박찬영은 결국 11회 1분 26초 TKO승을 거두고 홍수환이 가지고 있던 WBA 밴텀급 타이틀을 1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가져온다. 적지임에도 10회까지의 채점에서 3-0으로 앞서 있었다. 펀치의 파괴력은 무구루마에 비할 수 없이 떨어졌으나 스피드가 동반된 테크닉으로 연타에 의한 KO승을 이끌어낸 통쾌한 한 판이었다.

<4위> 유제두 7RKO승 와지마 고이치 1차전 : WBA Jr.미들급 1975/6/7 후쿠오카

7회에서 와지마를 세 번째 쓰러트리면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유제두.

7회에서 와지마를 세 번째 쓰러트리면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유제두.


1966년 김기수가 최초의 세계챔피언이 된 이후 김기수 키즈들은 무럭무럭 자라났고 9년 뒤 홍수환이 남아공화국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무너뜨리고 두 번째 세계챔피언에 오른다. 체급별로 좋은 선수들이 많이 생겨났음에도 국내 프로복싱의 흥행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고, 당시 일본은 와지마 이외에도 시바다 구니아키(WBC S페더급), 가쓰 이시마쓰(WBC 라이트급) 등 세 명의 세계챔피언을 보유하고 있는 복싱 강국이었다. 일본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 받던 국내 프로복싱은 유제두의 세계도전이 성사되면서 일본과 사상 최초로 세계타이틀매치에서 격돌이 이뤄졌다. 1968년 10월 프로에 데뷔한 유제두는 동양(OBF) 미들급 챔피언으로 타이틀을 14차례나 방어하고 7년 동안 39전을 싸운 끝에(37승 21KO승 1패 1무) 무려 40전 째 만에 세계타이틀 도전 기회를 잡은 것이다. 챔피언 와지마 고이치는 25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에 데뷔, 두 차례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베테랑으로 ‘불꽃의 사나이’로 불리는 일본 중량급의 영웅이었다. 1971년 10월 카르멜로 보시에게 판정승, 세계챔피언 등극 후 6차 방어에 성공한 뒤 1974년 4월 오스카 알바라도에게 15회 KO패로 타이틀을 상실했지만 7개월 뒤의 리턴 매치에서 판정승으로 설욕하고 유제두를 맞아 통산 7번째의 방어에 나섰다. 유제두는 7회에서 라이트훅에 이은 레프트훅을 연타로 챔피언의 안면에 터뜨려 첫 다운을 빼앗고 두 번의 다운을 더 추가하면서 와지마를 완전히 침몰시키고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들끓게 만들었다. 이 경기 이후 수많은 청년들이 복싱에 입문했고 국내에 프로복싱이 전성기를 맞게 된다.

<3위> 김철호 15R판정승 와타나베 지로 : WBC S플라이급 1981/4/22 서울

첫 방어전에서 명승부를 연출한 약관의 세계챔피언 김철호(왼쪽).

첫 방어전에서 명승부를 연출한 약관의 세계챔피언 김철호(왼쪽).


3개월 전 적지 베네수엘라에서 기적 같은 역전 KO승으로 타이틀을 획득한 김철호의 첫 방어전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졌다. 라파엘 오로노를 쓰러트린 보디샷이 럭키 펀치였다는 세간의 평가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밀려드는 환영 행사와 방송 출연 등을 최대한 자제하고 김진길 트레이너와 함께 엄청난 훈련을 소화해낸 김철호는 대한민국 유일의 세계챔피언이라는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혹독하게 1차 방어전을 준비했다. 도전자 와타나베는 10전 전승(7KO)의 교타자로 약관 20세에 불과한 챔피언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 일본에서도 중계반을 서울로 파견할 만큼 기대가 컸다. 한국과 일본으로 동시에 생중계된 이 경기에서 김철호는 인파이팅의 진수를 보여주며 도전자와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 명승부를 연출, 적은 차이지만 확실한 승리를 챙기고 방어에 성공했다. 3R, 사우스포 와타나베의 필살기인 라이트 쇼트 훅을 허용한 김철호의 글러브가 매트에 닿는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레퍼리는 다운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행히 김철호도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10라운드까지 쉴 새 없는 타격전 속에서 서로 대등한 양상의 열전을 보이던 경기는 체력이 앞선 김철호가 12R 이후 주도권을 잡고 와타나베를 공략, 근소차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김진국 부심이 148-146, 일본의 구루메 부심이 147-146, 중립국 미국의 에스킨 부심이 143-142로 3심 모두 챔피언의 손을 들어줬다. 불과 1년 후 WBA 동급 챔피언에 오른 와타나베 지로는 WBC 타이틀까지 따내며 총 11번의 방어에 성공하는 명 챔피언으로 성장한다.


<2위> 이형철 9RTKO승 오니즈카 가쓰야 : WBA Jr.밴텀급 1994/9/18 도쿄



이형철(오른쪽)은 놀라운 투혼으로 터프한 오니즈카를 무너뜨렸다.

이형철(오른쪽)은 놀라운 투혼으로 터프한 오니즈카를 무너뜨렸다.


1993년 7월 타이틀 재탈환에 성공한 유명우가 1차 방어전을 마친 후 명예로운 은퇴를 택했고, 11월과 12월 문성길, 박영균, 변정일 등 세 명의 세계챔피언이 나란히 아쉬운 판정으로 타이틀을 빼앗겨 무관으로 전락한 한국 복싱계에는 큰 위기감이 엄습했다. 당시만 해도 10명의 동양챔피언, 20명이 넘는 WBA, WBC 세계랭커가 포진했음에도 국내 프로복싱이 하향세에 접어들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93년 3월 변정일이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후 세계도전 8연패로 기세도 한풀 꺾여 있었다. 지명도전자 이형철은 이미 1년 전 도전 기회가 있었지만 부친의 병세가 심각해지는 바람에 천금의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드디어 도전이 성사되었다. 국내에서는 복싱의 인기 하락 및 지속적인 세계타이틀전 패배로 인하여 당일 경기의 생중계조차 포기했고, 추석날이던 저녁 프로그램은 예능으로 편성이 되었다. 미남복서 오니즈카는 이형철과의 6차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고 은퇴하여 연예인으로 데뷔가 예정된 24전 전승(17KO)의 하드펀처였다. 또한 임재신, 이승구 등을 맞아 심각한 편파판정으로 타이틀을 방어한 이력이 있어 KO가 아니면 타이틀 획득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형철의 타이틀 획득을 기대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형철은 독기를 품고 훈련에 매진했다. 병상에 누워계신 부친에게 반드시 세계챔피언벨트를 가져다드리겠다는 집념은 이형철의 또다른 무기였다.

1회부터 치열한 난타전을 펼친 두 선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진일퇴의 백병전은 1만 2,000 관중의 함성을 자아냈고 터프한 오니즈카는 이형철의 강펀치를 허용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반격을 취했다. 그리고 9라운드, 링 중앙에서 시작된 이형철의 공세가 주효하며 로프에 몰린 오니즈카를 상대로 1분여간 융단 포격을 퍼붓자 결국 존 코일 레퍼리는 경기를 중단시키고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알린다. 처절하게 집중타를 허용하고 그로기에 빠져서도 끝까지 매트에 눕지 않은 오니즈카의 근성도 대단했다. 우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8회까지의 채점은 77-74, 77-75, 77-76 모두 챔피언의 우세. 판정으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경기였다. 오니즈카는 패배 후 은퇴를 번복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재기하겠다고 밝혔지만 이형철 경기에서의 부상 때문에 망막분리 판정을 받아 재기의 꿈을 접었다.

<1위> 장정구 8RTKO승 도카시키 가쓰오 : WBC L플라이급 1984/8/18 포항

1라운드에서 레프트훅으로 다운을 빼앗아낸 장정구.

1라운드에서 레프트훅으로 다운을 빼앗아낸 장정구.


LA 올림픽이 한창이던 1984년 8월 18일 포항실내체육관은 입추의 여지없는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특급 챔피언으로 올라선 장정구의 4차 방어전, 도전자는 전 WBA 동급 챔피언 도카시키 가쓰오였다. 김용현을 누르고 세계랭킹에 진입한 뒤 김환진을 꺾고 세계타이틀을 따낸 도카시키는 지명도전자 김성남, 전 챔피언 김환진의 도전을 모두 뿌리친 한국복서 킬러였기 때문에 장정구가 멋지게 설욕하기를 바라는 복싱팬들의 기대는 엄청났다. 다이나믹한 움직임과 빠른 스피드로 상대를 괴롭히는 도전자가 외곽으로 돌면서 챔피언의 인파이팅을 차단할 것으로 대부분의 전문가가 예상한 가운데 1R 시작 공이 울렸고 경기 전의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카시키는 초반부터 맹렬히 밀고 들어왔다. 천하의 파이터 장정구를 상대로 인파이팅의 맞불을 놓자 순식간에 경기장은 한 여름의 무더위보다 더 뜨거운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초반 도전자의 공세에 당황한 장정구는 좋은 펀치를 여러 차례 허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고 1라운드 종반 맹공을 펼치던 상대의 턱에 레프트훅을 카운터로 터뜨려 첫 다운을 빼앗아낸다. 터프하기로 정평이 났던 도카시키의 생애 첫 다운이었다. 그러나 도카시키는 기선을 제압당하고도 끊임없이 챔피언에게 달려들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두 선수의 타격전은 그렇게 8라운드까지 한여름 밤을 수놓았다. 그리고 9라운드, 끊임없는 펀치 교환 속에서도 꾸준히 우위를 점한 장정구는 라운드 중반 강력한 원투를 도전자의 안면에 터뜨렸고, 도전자가 데미지를 입으며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수한 연타를 퍼붓는다. 1분 47초. 레퍼리 스티브 크로슨의 경기 스톱이 선언되자 온 몸의 기력이 빠진 챔피언은 그대로 링 바닥에 허물어지며 승리를 만끽했다. 장정구 복싱의 표본과 같았던 이 아름다운 승부는 국내 프로복싱 역사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대단한 경기였다. [황현철 헤럴드스포츠 복싱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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