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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위한 90초의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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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위한 90초의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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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예원

일러스트레이션 김예원


넷플릭스에서 지난 5주간 순차적으로 공개된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2’는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중 프로그램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라운드의 미션은 다소 의외였다. 90분 동안 ‘오직 나를 위한 단 하나의 요리’를 만드는 것. 현실에서는 손님을 위해, 프로그램 안에서는 심사위원을 위해 요리하는 데 익숙했던 요리사들은 이 미션에서 잠시 당황한다.



결승전까지 주로 ‘조림을 잘하는 요리사’로 알려져 있던 최강록 셰프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육수를 바탕으로 한 국물 요리를 선택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재료들만을 가득 담은 요리를 만들어 백종원, 안성재 두명의 심사위원에게 내놓았다.



“저한테 좀… 그, 위로를 주고 싶었습니다. 매일 너무 다그치기만 했는데, (저를 위한 요리에) 90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이 가상 공간의 세계에서라도 이렇게 위로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 한마디에 현장의 많은 요리사들이 고개를 떨궜다. “나를 위해 요리를 해준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말한 참가자도 있었다. 많은 요리사들이 “나 자신을 위해 해주는 요리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입을 모았다.



어디 요리사들뿐이었을까. 화면 너머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정신없이 앞만 보며 살아온 사람들, 가족과 일을 챙기느라 자신은 늘 후순위로 밀려났던 사람들, 삶에 여유를 허락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온 이들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정신 건강을 위해 하루 90초도 쓰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말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진료실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는 나에게도 이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환자들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고, 성실하며 책임감 있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내가 만난 한 환자는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동시에 일곱가지 부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은 유독 가혹하다.



“지금 쉬면 뒤처진다”, “남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이렇게 나약하다”, “이게 다 내가 부족해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그치며 살아온 시간이 쌓여, 결국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경우를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 자주 마주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환자들에게, 그리고 글을 통해 만나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스스로를 대해주세요.”



그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손님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연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말을, 유독 자기 자신에게만은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많은 정신적 어려움은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오래 가혹했기 때문에, 혹은 스스로를 충분히 아껴주지 않고 몰아붙였기 때문에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최강록 셰프는 결승전에서 조림 음식이 아닌, 국물 요리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요리 서바이벌에서 우승한 뒤, 조림 음식을 많이 해서, ‘조림을 잘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림을 잘 못하지만 조림을 잘하는 ‘척’했습니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 ‘척’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아온 인생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요리에서까지, (남들이 내가 잘할 것이라 기대하는) 조림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이 말 앞에서 현장에 있던 요리사들과 심사위원들마저 무장해제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타인 앞에서 일정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면을 쓰며 느끼는 내적 갈등은, 진료실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처럼 인종과 성별, 직업과 나이를 막론하고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그건 당신이 잘하는 거잖아.”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악의 없이 던지는 그 기대에 응답하다 보면, 우리는 점점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남들이 바라는 나’에 가까워진다. 타인이 나에게서 원하고 기대하는 것에 매몰된 나머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습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나’의 모습은 어떤지조차 흐릿해져만 간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기대에 부응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수많은 외적인 평가들에 맞춰 스스로의 꿈을 조정하고, 현실에 타협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정작 그 선택들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점점 사라져 간다.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려온 오늘 하루 속에, 나 자신을 위한 위로의 시간은 점차 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최강록 셰프의 “나 자신을 위해 단 90초도 써본 적이 없었다”는 고백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앞으로 하루에 단 90초라도, 나 자신을 위해 써보는 건 어떨까.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좋다. 그저, 오늘 하루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칭찬 한가지를 떠올려보는 것, 감사한 일 두세가지씩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은 위로를 얻는다. 그저 누구도 아닌 나만을 위해 차린, 내가 좋아하는 재료로 만든, 내 영혼을 위한 한 그릇의 국물 요리처럼.



‘흑백요리사 2’의 마지막 요리는 그렇게 끝났지만, 최강록 셰프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오래 남는다. 오늘 하루,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나에게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계속 잘해내라”는 다그침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애써온 자신에게 건네는 짧은 위로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여러 통계가 말하듯, 한국 사람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2026년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조금 더 관대해지기를 바라며 새해 첫 칼럼으로 고국에 러브레터를 보낸다.





나종호 | 미국 정신과 전문의이자 중독 정신과 전문의. 아픔을 고백하면 약점 잡기보다는 함께 공감해주고, 그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저서로는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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