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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폭력 기억, 그럼에도 여성이 기록을 멈추지 않은 이유···‘물의 연대기’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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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폭력 기억, 그럼에도 여성이 기록을 멈추지 않은 이유···‘물의 연대기’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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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장편 감독 데뷔작
작년 칸서 첫 공개, 황금 카메라상 노미네이트
동명의 회고록 원작, 굴곡진 여성의 삶 그려내
영화 <물의 연대기>의 한 장면. 주인공 ‘리디아’를 연기한 이모젠 푸츠. 판씨네마 제공

영화 <물의 연대기>의 한 장면. 주인공 ‘리디아’를 연기한 이모젠 푸츠. 판씨네마 제공


“순서대로 말하고 싶지만, 내 기억에는 순서가 없다. 그저 반복되는 패턴일 뿐이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학대와 방임 속에서 자란 ‘리디아’(이모젠 푸츠 역)는 수영만을 안식처로 여겼다. 그는 수영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면서 가정 폭력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자유를 얻은 그는 알코올 중독과 방황으로 삶의 갈피를 잃어버린다. 그는 친구 권유로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영화 <물의 연대기>는 2011년 출간된 미국 오리건주 교사이자 소설가인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동명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한다. 이 회고록은 폭력과 수치의 기억을 솔직히 담아냈다는 평을 받으며 이듬해 오리건 도서상을 받는 등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영화 <물의 연대기>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영화 <물의 연대기>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영화 <물의 연대기>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영화 <물의 연대기>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영화는 ‘연대기’라는 제목처럼 리디아가 겪은 일련의 사건을 다섯개의 챕터로 나눠 전개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릴 적 트라우마에 대한 플래시백을 반복하는 등 비선형적으로 재구성돼있어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극 중 리디아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진짜 일어났는지 모르겠는 일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관객들은 불친절하게 제시되는 사건들을 옷을 기워내듯 이어야 한다.

영화는 상처받은 인물도 과거를 딛고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다만, 리디아가 겪었던 사건들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성폭력 묘사와 노골적인 노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는 회고록에서 묘사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가정 폭력, 이로 인해 겪었던 인생의 굴곡들을 약간의 영상적 기교만 가미한 채 화면 속에 담아내는데, 보는 이에 따라 고개를 돌리고 싶어질 수 있다.

연출도 의도적으로 관객들의 불편감을 가중시킨다. 인물의 얼굴 등 신체를 클로즈업해 몰아치는 사건에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책상을 치고 뺨을 때리는 등의 날카로운 소리를 이용한 연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관객들이 안심하는 순간, 주인공의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플래시백 연출은 보는 관객도 주인공이 된 듯 괴로운 기분이 들게 한다.


영화 <물의 연대기>의 촬영 비하인드 컷.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오른쪽)와 배우 이모젠 푸츠. 판씨네마 제공

영화 <물의 연대기>의 촬영 비하인드 컷.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오른쪽)와 배우 이모젠 푸츠. 판씨네마 제공


<물의 연대기>는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알려진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첫 장편 감독 데뷔작이다. 영화는 제78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을 통해 최초 공개됐으며, 그해 칸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 후보에 올랐다. 과거 ‘하이틴스타’로 분류됐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물의 연대기>를 통해 ‘반항의 아이콘’을 넘어서 작가주의적 작품을 지휘한 영화감독으로 거듭났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2017년 영화화 판권을 직접 구매해 약 8년간 영화화 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책을 40페이지가량 읽자마자 세상에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해 작가에 이메일을 보냈다”며 “책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 리디아가 경험한, 여성에게 강요된 침묵과 수치심은 나를 포함한 여성들의 집단 의식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자신의 영화를 “탄생과 재탄생,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이며 언어를 통해 자신의 육체를 되찾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그는 <물의 연대기>가 “추악함을 목격하고 수치심과 마주해 당신의 신체와 이야기가 당신 것임을 드러내라는 초대장”이라며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행위 자체가 삶을 뒤바꾸는 급진적인 힘이 된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극장을 나가며 깨닫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