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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보기를 연예인 보듯… “회장님 일상이 궁금해요”

조선일보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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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보기를 연예인 보듯… “회장님 일상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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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反재벌 정서는 옛말
달라진 대중 시선
재벌을 현실 너머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흥미로운 캐릭터’로 소비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임세령 대상홀딩스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뉴스1·두을장학재단·김동환 기자·신세계그룹

재벌을 현실 너머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흥미로운 캐릭터’로 소비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임세령 대상홀딩스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뉴스1·두을장학재단·김동환 기자·신세계그룹


“원피스 명품이겠지?” “어느 브랜드 제품이야?” “10만원대라는데?”

지난 9일, 한 행사에서 ‘그녀’가 입은 회색 원피스가 맘카페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화제가 됐다. “어디서 살 수 있나요” “제품 정보 좀 알려 달라”는 게시물이 잇따랐다. 곧 해당 원피스가 국산 브랜드 제품으로 가격은 17만7000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청담동 매장을 방문해 직접 입어 본 뒤 샀다더라” “수백만 원대 명품인 줄 알았는데 의외다”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화제의 주인공은 연예인도, 인플루언서도 아니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었다.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두을장학재단 장학증서 수여식에 참석한 이 사장의 모습이 포착되면서 그가 입은 옷에도 관심이 쏠린 것이다.

비슷한 장면은 지난달에도 있었다. 임세령 대상홀딩스 부회장이 아들의 해군 장교 임관식에 참석하며 착용한 검은색 선글라스와 코트, 토트백이 ‘올 블랙(All black)’ 패션으로 주목받았다. 이 가운데 프랑스 브랜드 선글라스는 60만원에 가까운 가격에도 불구하고 ‘임세령 선글라스’로 불리며 품절 대란을 빚기도 했다.

재벌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경영 성과와 업적, 성공 서사 등의 능력이 주된 관심사였다면 최근에는 무엇을 먹고 입는지, 어떤 말투와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가 화제의 중심에 놓인다. 특권과 불공정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보다 “소탈하다” “부티난다”는 평가와 함께 호감과 관심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늘었다. 전문가들은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진 가운데, 재벌을 현실 너머의 ‘신화적 존재’나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곁에 실존하는 ‘흥미로운 캐릭터’로 마주하면서 생긴 변화”라고 분석했다.

◇연예인 응원하듯 “회장님, 힘내세요”

산업화와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재벌은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불렸지만 한편으론 정경 유착이나 특혜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 재벌은 권위적이고 오만하거나, 서민과 동떨어진 인물로 그려지곤 했다. 중저가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이 비치기라도 하면 “‘서민 코스프레’ 한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재벌이 긍정적으로 회자되는 경우는 주로 ‘맨손 창업’이나 ‘불도저식 경영’ 같은 성공 서사였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치맥(치킨+맥주) 회동’ 당시 세 사람을 보려는 시민들로 매장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야유 대신 환호가 이어졌다. 인기에 힘입어 해당 치킨 매장에는 “(회동을 했던) 테이블 좌석 이용 시간을 한 시간으로 제한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기도 했다. ‘기운 받아가겠다’며 찾는 고객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재벌의 모습이 밈(meme·유행 콘텐츠)처럼 소비되기도 한다. 이재용 회장이 3년 전 윤석열 전 대통령, 다른 대기업 총수들과 함께 부산 깡통시장을 방문했을 당시의 장면은 영상으로 확산돼 지금까지도 각종 패러디로 재생산되고 있다. 시민들이 “이재용”을 연호하자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하는 동작이다. 이 회장이 “사장님, 저는 어묵 국물 좀”이라고 말했던 어묵집은 ‘쉿, 어묵집’ ‘이재용 맛집’으로 불리며 손님들의 방문 후기가 지금도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연예인 일상에 관심을 갖듯 소셜미디어 팔로우를 하고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각각 79만명과 7만명이다. 1년 넘게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는데도 과거 게시물에 “회장님, 힘내세요” “게시물 좀 올려 달라” 같은 댓글이 달린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재벌 3·4세 역시 자신의 배경을 숨기지 않고 유튜브·방송 등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과거였다면 ‘집안을 앞세워 대중의 관심을 얻는다’는 비판이 뒤따를 법도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배경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로 받아들여지는 모습이다.

지난 17일 한 예능 프로그램에는 범현대가 집안 출신 레이서인 신우현(22)씨가 출연했다. 신씨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조카로, 어머니는 정몽구 명예회장의 셋째 딸인 정윤이씨다. 학업을 이유로 팀 활동을 잠시 중단한 아이돌 그룹 소속 가수 애니(24·본명 문서윤)는 정유경 신세계 회장의 장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며 팬들과 소통했다. DL그룹 4세인 이주영(26)씨는 구독자 5만여 명의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말투·성격·이미지·패션이 궁금해

재벌을 둘러싼 설문조사 결과를 들여다보면 달라진 대중의 시선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무튼, 주말’이 SM C&C 설문 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성인 149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재벌’이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드는 감정 1위는 ‘부러움’(52.2%)이었다. ‘불신’과 ‘분노’는 각각 13.6%와 4.2%였다.


대중은 연예인 같은 유명인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재벌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재벌 관련 이슈에서 가장 관심 가는 요소를 묻자 ‘말투·성격·이미지·패션·뷰티·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한 응답이 27.3%로 가장 많았다. 2위는 ‘재산 규모·기업 순위‘(26.7%), 3위는 ‘경영 성과·사업 전략‘(25.3%)이었다. 재벌의 패션 정보가 화제가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43.9%가 ‘자연스러운 문화 소비·연예인 소비와 다르지 않다’고 답해 비율이 가장 높았다. ‘흥미는 있지만 과하다’가 27.4%, ‘불편하거나 씁쓸하다’가 15.9%였다.


◇반재벌 정서 언제든 커질 수 있어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람들이 재벌의 캐릭터에 주목하게 된 배경을 정보 습득 방식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서 찾는다. 과거 대중에게 재벌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었고 사적 일상이나 생활 방식이 전면에 드러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재벌 개인의 말투와 옷차림, 일상의 모습이 빠르게 퍼지고 재생산된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실시간으로 이미지가 노출되는 환경에서는 추상적인 성공 서사보다 구체적인 캐릭터와 이미지가 더 빠르게 소비된다”며 “현대 사회는 상품의 물질적 기능보다 그 상품이 상징하는 이미지 자본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만큼 기업을 대표하는 재벌도 그 대상이 된 것”이라고 했다.

과거처럼 정경 유착이나 대형 비리 이슈가 반복적으로 터지지 않는 상황도 재벌 개인의 이미지가 먼저 소비되는 환경이 만들어진 배경으로 꼽힌다. 김윤태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교수는 “한국의 반(反)재벌 정서에는 민주화 이후 잇따라 드러난 비리 문제와 외환위기 등으로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경험이 작용했다”며 “최근에는 이러한 이슈가 상대적으로 줄어든 데다 AI를 비롯한 첨단산업에서 대기업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기업과 재벌을 바라보는 태도가 한층 부드러워진 측면이 있다”고 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2025년 기업호감지수(CFI)’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의 기업 호감도는 100점 만점에 56.3점으로 조사를 시작한 2003년 이후 가장 높았다. 이유로는 ‘국가 경제에 기여’(40.8%)를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이런 사회적 인식 변화가 재벌 개인의 캐릭터를 편견 없이 보게 하는 심리적 바탕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재벌가에 대한 지나친 ‘팬덤화(化)’를 우려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 총수는 이윤 창출과 일자리 마련과 같은 경제적 기여와 사회적 책임을 잣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라며 “개인적 매력에 가려져 경영 본질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무뎌지는 일이 없도록 법 준수와 윤리 경영 같은 기본을 지키고 있는지 냉철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윤태 교수도 “재벌 총수의 개인적인 일탈이나 기업을 둘러싼 반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경우, 지금의 호의적인 분위기는 언제든 돌아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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