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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일 커플의 결혼식에서

조선일보 김황식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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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일 커플의 결혼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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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일러스트=유현호

일러스트=유현호


“신랑과 신부는 지금까지 사귀는 동안 별다른 의견 대립이나 다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살다 보면 의견의 차이나 다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 등 때문입니다. 더욱이 두 분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 차이 등에서 오는 많은 갈등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래도 다툼이 해결되지 않으면 신랑이 양보하기 바랍니다. 져주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만약 한일 간 축구 시합이 열리면 신랑은 일본팀을, 신부는 한국팀을 응원하기 바랍니다.”

얼마 전 제가 맡았던 결혼식 주례사의 일부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객들의 웃음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주례사를 하는 중간에 박수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한 해에 한두 번씩 결혼식 주례를 섰으나 이제는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가까운 후배의 부탁을 받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응낙하였습니다. 일본인을 며느리로 맞게 되어 여러 생각이 교차했을 신랑의 아버지를 축하하고 격려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례사는 여느 때처럼 10분 정도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외국에 있는 신랑 신부는 바쁠 테니 식전이나 식후에 주례에게 인사 오지 않도록 당부하였습니다.

20여 년 전 처음 주례를 설 때는 원고를 준비하였지만, 차츰 키워드 몇 자를 정리한 메모를 갖고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노련함(?)이 생겨 그동안 별다른 부담 없이 주례를 섰습니다.

그런데 이번 결혼식은 달랐습니다. 혼주 측에서 주례사 원고를 사전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일본에서 오는 하객들을 위하여 주례사를 번역하여 스크린에 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조금은 귀찮았지만, 원고를 작성하다 보니 좀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어 훨씬 좋았습니다. 그러나 혼인 서약은 신부로부터는 직접 일본어로 받았고, 성혼 선언도 일본어와 한국어로 했습니다. 이것은 결혼식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신랑 신부에게 상대방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배려하며 살 것과 상대방 부모님을 자신의 친부모님처럼 모실 것을 당부했습니다. 특히 신랑에게는 신부의 어머니를 작고한 신부 아버지의 몫까지 두 배로 더 살뜰하게 잘 모실 것을 당부했습니다. 두 분은 좋은 가정에서 자라 신랑 신부 모두 도쿄대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복 받은 사람들인 만큼 사회적 책임을 갖고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질 것,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좋은 이웃으로 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 건강 관리에 힘쓰고 좋은 취미 생활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배려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처럼 배우자, 부모님, 이웃과 자신을 배려하는 외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당부했습니다. 살다 보면 불만스럽고 짜증 나는 일이 많이 있지만, 이런 때는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기보다 감사할 일들을 찾아 감사해야 할 것이고, 그리하면 오히려 행복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벌하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고 불평·불만의 생각이 들면 내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빨리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로 돌아오길 당부했습니다. 두 사람이 ‘배려’와 ‘감사’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분명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결국 ‘배려’와 ‘감사’ 두 낱말이 이번 주례사의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주례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한 지인이 “자신이 실천한 대로 이야기한 거지요?” 하고 짓궂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는 답은 못 하고 그냥 웃었습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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