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씨는 5공 시대를 돌아볼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사건은 시중에 파다한 소문에서 시작됐다. 이순자 여사의 측근인 미모의 여성이 서울 시내 특급호텔 한 층을 세내어 쓰면서 대형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 씨는 이순자 여사의 작은아버지 이규광 씨 처제이고, 남편 이 씨는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이었다. 장 씨 부부를 통해 청와대가 비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자 청와대 민정팀 내사를 거쳐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겨우 안정돼 가던 청와대와 나라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은”(이순자 자서전)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장 씨 부부는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에 접근해 현금을 빌려준 뒤 거액의 어음을 받아내고 이를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챙긴 현금으로 다른 회사에 같은 수법으로 사기 쳐 돈을 불렸다. 피해액이 6400억 원대로 당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2%, 정부 예산의 10% 수준이었다. 철강업계 2위 일신제강과 도급 순위 8위 공영토건을 비롯해 여러 회사가 부도났고, 이규광 씨를 포함해 30명 넘게 구속됐다. 정부는 민심 수습을 위해 총리를 비롯한 5공 실세 19명을 교체했다. 그러고도 장 씨는 당당했다. “경제는 유통이다. 날 풀어주면 막힌 돈을 유통시킬 자신 있다.”
▷5공 청산 후로도 장 씨는 출소와 재범을 되풀이했다. 1차부터 6차 사건까지 법원이 인정한 피해액만 6891억 원이다. 장 씨는 왜 멈추지 않는 걸까. 사기는 피해자가 속아 넘어가야 완성되는 범죄여서 사기꾼 입장에선 ‘속는 사람이 나쁘다’고 범죄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어 재범률이 높다. 특히 장 씨처럼 ‘큰 건’을 성공시켜 본 사람은 그 쾌감이 워낙 커 평범한 삶은 무료해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은 피해자에겐 악몽이고 정권에도 치명타였지만 돈도 가족도 없고 세금 체납액만 21억 원인 장 씨에겐 그 시절이 화양연화였을지 모른다. 각별한 인맥과 ‘고위층 구권 화폐 비자금’ 같은 거짓말을 흘려 쉽게 돈뭉치를 만들 수 있었고, 당시 서울 시내 20평대 아파트를 사고도 남는 1100만 원을 하루 생활비로 쓰고 외제차 5대를 굴렸다. 지금은 사기 수법도 첨단화하고 있지만 장 씨는 여전히 어음이나 위조 수표 방식을 고수하며 화려했던 ‘큰손의 추억’에 갇혀 사는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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