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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美주식 가장 큰 손, 서학개미

조선일보 이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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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美주식 가장 큰 손, 서학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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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글로벌 금융계는 서울발(發) 통계 하나에 경악했다. ‘코스피 200 옵션’ 거래량이 독일 유렉스(Eurex), 미국 CME 등 세계 2위~5위의 파생상품 시장을 다 합친 것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옵션은 예측이 틀리면 원금 전부를 날리는 데다 복잡한 수치까지 다뤄야 해 선진국에선 헤지펀드나 퀀트 같은 베테랑 전문가 중심의 시장이다. 그런데 한국은 거래의 절반 이상을 주부와 대학생, 직장인 등 ‘개미’들이 주도했다. 모험 투자 열풍은 2001~2011년 11년 연속 세계 1위란 기록으로 이어졌다.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심리는 이제 뉴욕 증시로 옮겨 붙었다. 한국 투자자들이 미국 시장에서 외국인 중 가장 큰 손이 됐다. 지난해 1~11월 미국 증시에서 외국인 순매수액 중 한국인 비중이 11%였다. 조세 회피처를 제외하면 77국 중 단연 1위다. 2024년 7위였는데 1년 만에 일본, 싱가포르까지 제쳤다. ‘수익이 있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 간다’는 서학개미의 저돌적 성향이다.

▶엔비디아·테슬라·팔란티어 등은 기본이고 일반인에겐 이름도 생소한 종목까지 서학개미 리스트에 올라 있다. 비트코인을 대량 보유한 ‘마이크로스트레티지’, 꿈의 기술로 불리는 양자컴퓨터 선두 주자 ‘아이온큐(IonQ)’ 등에도 개미들이 몰렸다. 2년 전 엔비디아에 올라타 4~5배 수익을 내고, 1년 전 팔란티어를 골라 두 배 넘는 결실을 봤다고 하니 이들의 안목은 기성 금융권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미국 주식 열풍의 이면엔 우리 사회의 그늘도 있다. 월급 받아선 내 집 마련의 꿈도 못 꾸는 청년들, 승진보다 삶의 질을 택한 직장인들이 뉴욕 증시의 우상향 곡선을 믿고 승부수를 던졌다. 연금 수령 전까지 소득이 끊기는 ‘연금 크레바스’에 처한 조기 퇴직자들까지 가세하면서 미국 주식은 재테크를 넘어 인생의 구원 투수로도 불린다고 한다.

▶익숙한 자국 주식을 선호하는 현상을 ‘홈 바이어스(Bias)’라 한다. 한국은 거꾸로 자국 주식을 외면하는 ‘포린(Foreign) 바이어스’의 나라다. 세대도 가리지 않는다. 지난해 60대 이상의 해외 주식 계좌 수가 21%나 급증했다. 배당금이 들어오는 뉴욕 증시의 ‘슈드(SCHD)’ 등 고배당 ETF(상장지수펀드)에 노후 자금을 넣는다. 최근 10년간 미국 S&P 500 지수가 연평균 11% 수익률을 기록할 때 코스피는 그 절반 이하에서 밑돌았으니 미국 주식에 대한 신뢰는 합리적이다. ‘자본 망명객’이 된 서학 개미들이 우리 주식시장으로 돌아올 날을 기대해본다.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이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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