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정다운 |
한국이 지난해(1~11월) 미국 주식을 663억달러 순매수하며 최대 순매수국으로 올라섰다. 개인·기관 투자자 및 연금 등이 모두 AI(인공지능) 호황을 이끄는 미국 기업 및 ETF(상장지수펀드) 등의 투자를 크게 늘린 결과다. 미래 산업으로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AI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이 미국에 많고 주식 시장 장기 상승률도 꾸준히 높은 수준을 기록 중이기 때문에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 투자자들은 미국 투자를 늘리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미국 투자가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 다섯 명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이남우 한국거버넌스포럼 회장(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 /고운호 기자 |
주식시장엔 보통 ‘홈 바이어스’, 즉 친숙한 자국 주식을 상대적으로 많이 사는 현상이 있다. 지금 한국은 반대로 ‘역(逆) 홈 바이어스’가 작동하는 모습이다.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늘리는데도 한국인 사이에 오히려 ‘한국 주식은 어차피 안 된다’는 정서가 팽배한 상태다. 최근 상법 개정 등 여러 노력에 외국인은 한국 주식 투자를 늘리고 있는데 한국인들의 한국 주식 시장에 대한 불신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한국 주식 시장에선 사실 오랜 기간 투자자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총수익률(배당 및 주가 상승에 따른 시세 차익)이 매우 낮았다. 지난해 5월부터 상법 개정 등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가 급등하긴 했지만 그 전 10년 동안 총 주주 수익률이 연 5% 수준으로 미국(12~13%)의 절반도 안 됐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위험을 감당하면서 하기 때문에 적어도 연 8% 정도는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 크게 낮았다. 그러다 보니 투자자들은 계속 ‘대안’을 찾았고 코로나 전후로 미국 투자에 눈을 뜬 후 최근 들어 점점 더 미국으로 투자가 몰리는 상황이다. 미국은 장기적인 주식시장 성장과 투자자 보호가 모두 이뤄졌는데, 한국은 과거를 장기적으로 돌아보면 그 반대였던 점을 투자자들이 인식하는 듯하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전기병 기자 |
한국인이 새로운 기술에 쉽게 적응한다는 측면도 최근 미국 주식 투자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는 두 갈래로, 첫째는 한국의 주식 투자 앱을 통한 해외 주식 투자가 그 어떤 나라보다 쉬워졌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최근 미국 주식 시장을 이끌고 있는 테크주에 대한 한국인의 친밀도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은 친숙한 주식을 사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 투자자들은 삼성전자의 반도체보다는 내 손에 쥐고 매일같이 쓰는 애플의 아이폰,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구글·페이스북 등을 익숙하게 여기는 상황이 됐다. 그만큼 한국인이 신기술에 능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인이 주로 산 미국 주식을 보면 대부분이 테크주다.
그래픽=김성규 |
아울러 글로벌 시대에 전 세계 분산 투자를 해서 위험을 줄인다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인의 미국 주식 투자 비율은 아직 지나치게 높다고 볼 수준은 아니다. 한국 주식 시장의 시가총액은 여전히 세계의 2%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큰 주식 시장인 미국으로 눈을 돌리는 현상이 자연스럽다. 다만 한국 투자자들은 한꺼번에 빨리 투자 패턴을 바꾸는 경향이 있어 지난해 갑자기 미국 주식으로 유난히 많이 몰렸다. 이로 인해 속도가 매우 빠른 ‘갑작스러운 쏠림’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
(실제로 한국의 미국 주식 투자 잔액 기준 순위는 12위로 한국 경제 규모 순위인 12~13위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지는 않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
지난해 갑자기 미국 주식 투자가 많이 늘어 주목을 받긴 했지만 한국 가계 금융 자산 중 해외 비율은 5%대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아직 낮은 수준이다. 국민연금만 봐도 해외 투자 비율이 40%가 넘는데, 개인이 이만큼을 따라가긴 어렵겠지만 가계가 해외 비중을 어느 정도 늘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아울러 한국 시장이 ‘작년 빼고 수년간’ 힘들었던 기억이 막연한 불안으로 작동하고 있다. 다만 2010년 이후만 보면 미국 성과가 압도적이지만, 더 긴 역사로 보면 미국도 10년 이상 주식 시장이 횡보했던 시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은 투자자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훌륭해 보이는 미국 주식’으로 쏠리는 현상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다소의 과잉 낙관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점 또한 감안해야 한다.
그래픽=백형선 |
저금리가 장기화한 일본의 경우 개인 투자자들은 미국 채권을 많이 매수한 반면 한국은 미국 주식, 그중에서도 나스닥 3배 레버리지, 테슬라 등 변동성이 큰 종목으로 투자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수익률 변동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일본인이 미국 채권을 상대적으로 많이 사들여 채권을 포함한 전체 증권 투자 규모는 일본이 1122억달러로 한국을 앞선다. 그렇다 하더라도 채권을 포함한 한국인의 미국 증권 투자 순위는 조세 회피처인 케이먼군도·아일랜드를 제외하면 세계 6위로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
◇오건영 신한은행 패스파인더 단장
오건영 신한은행 패스파인더 단장. /박성원 기자 |
코로나 이후 개인들이 미국 투자에 본격 진입했다. 주식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어도 “미국 주식은 꾸준히 올라간다”는 서사가 성립됐다고 본다. 한국 개인이 주식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선 코로나 이후 약 3년간 한국 코스피는 박스권에 머물렀지만 미국(S&P500)은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모습이 뚜렷했다. 그런 경험상 미국 쪽으로 기울기 쉬웠다는 의미다.
환율과 미국 주식 투자는 상호 영향을 끼친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올라가리라는 기대가 커질 때는 달러를 들고 미국 주식을 사면서 환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다. 반대로 혹시라도 글로벌 경제에 충격이 발생해 주식 시장이 전반적으로 하락할 때가 되면 안전 자산인 달러의 가치는 올라가기 때문에 전체 수익률을 방어할 수 있다고 투자자들은 생각한다.
그래픽=김성규 |
무엇보다 미국 주식은 선택지 자체가 많다. 요즘은 미국 배당주, 옵션 등을 활용해 ‘미국 주식으로 월 현금흐름 만들기’ 같은 포트폴리오가 유행하고 있다. AI 혁신 기업에 투자해 큰돈을 번 성공 사례가 많이 나왔다는 점, 주변의 지인들이 미국 투자로 수익을 많이 내는 모습 등을 보면서 미국 투자에 대한 선호도가 올라갔다고 본다. 이는 서학개미(개인 투자자)만의 현상으로 보긴 어렵고, 기업 등 다른 경제 주체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대표. /전기병 기자 |
트럼프 취임 이후 한국·일본이 “미국에 돈을 뺏기고 저항도 못하는 약한 나라”라는 식의 글로벌 시각이 형성됐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달러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는 한국의 통화는 계속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서사가 퍼졌다. 달러 자산 선호가 일어나는 배경이다.
지난 3년 약세장의 후유증도 한국 대신 미국 투자를 늘어나게 한 원인이었다고 본다. LG에너지솔루션 상장 무렵인 2022년부터 2024년 말까지 3년 동안 한국 주식 시장은 많이 힘들었던 반면 미국 주식 시장은 많이 올랐다. 이런 대비 속에 ‘국장(한국 주식시장) 탈출은 지능순’ 같은 게시물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확산됐다. 지난해 코스피가 강하게 반등했음에도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가 아직은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래픽=김성규 |
아울러 개인들은 ‘AI로 돈 버는 곳은 결국 미국 기업’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본다. 앤트로픽·오픈AI 등 화제가 되는 화려한 AI 기업들은 대부분 미국 기업이다. 한국 반도체가 AI 호황 가운데 단기적인 수혜를 보더라도 결국 시장이 주목할 ‘큰 돈’은 미국 AI 기업이라는 생각이 한국인의 투자 심리를 이끌고 있다.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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