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의 세 가지 빛깔
제임스 캐플런 지음|김재성 옮김|에포크|660쪽|4만2000원
재즈는 무엇보다 화려한 음악이었다. 10명 이상의 대편성 악단인 빅 밴드(Big Band) 시절에는 춤추기 위한 흥겨운 리듬감이 핵심이었다. 또한 재즈는 뜨거운 음악이었다. 초절 기교의 손놀림으로 속사포처럼 질주하는 비밥(Bebop) 재즈는 현란한 개인기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뜨겁기보다는 서늘하고, 흥겹기보다는 차분하고 이지적인 재즈도 가능할까. 그런 역발상으로 탄생한 음악이 바로 ‘쿨 재즈(Cool Jazz)’였다. ‘쿨’이라는 단어에는 ‘차갑다’는 표면적 의미뿐 아니라 멋지고 세련되고 최신 유행을 주도한다는 숨은 뜻이 있다. 그 의미를 빚어낸 분야 가운데 하나가 재즈였다.
미국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인 제임스 캐플런의 ‘블루의 세 가지 빛깔’은 1959년의 전설적 명반 ‘카인드 오브 블루(Kind of Blue)’의 탄생 과정을 살피고 있다. 이 음반의 수록곡은 다섯 곡이 전부. 재생 시간도 45분 남짓이다. 그런데도 재즈 역사상 최고의 음반을 꼽을 적마다 이 음반은 빠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책 제목에도 ‘블루’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음반의 주역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밴드의 리더였던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1926~1991), 동갑내기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1926~1967), 막내인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1929~1980)다. 그래서 제목도 ‘세 가지 빛깔’이다.
에포크재즈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카인드 오브 블루’에 참여한 음악인들. 빌 에번스(왼쪽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캐넌볼 애덜리, 존 콜트레인. |
유비·관우·장비가 의형제의 연을 맺는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삼국지연의의 초반에 곧바로 나온다. 하지만 이들 재즈 삼총사의 등장은 정반대다. 한국어판 660쪽인 이 책의 중간 지점인 295쪽에 이르러서야 이들 셋은 본격적으로 의기투합한다. 두괄식이나 미괄식이 아니라 정점에 해당하는 순간을 한복판에 배치한 중괄식 구성이야말로 이 책의 특징이다. 대신 책의 초반부는 2차 대전 직후의 재즈에 대한 시대상과 함께 ‘재즈 삼총사’의 성격 묘사에 할애한다. 요즘 말로는 ‘캐릭터 구축’에 공을 들인 것이다.
인종도, 악기도, 가정 환경도 달랐지만 이 삼총사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스타 연주자인 동시에 외골수이자 반항아였다는 이중적 성격이었다. 역시 요즘 말로는 ‘인사(인사이더)’와 ‘아사(아웃사이더)’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아버지가 치과 의사였던 흑인 중산층 출신으로 줄리아드 음악원에도 다녔던 데이비스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불과 18세에 전설적 색소폰 명인 찰리 파커(1920~1955)의 낙점을 받으며 일약 재즈계의 ‘총아(寵兒)’로 부상했다. 얼핏 집안이든 학벌이든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지만 그에게도 결정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찰리 파커처럼 빠르고 화려하게 연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쿨 재즈’는 그의 음악적 생존법이기도 했다.
한술 더 떠서 빌 에번스는 스트라빈스키·라벨·라흐마니노프를 좋아했던 음대 출신의 백인 피아니스트였다. 흑백 갈등으로 몸부림쳤던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재즈는 엄연히 흑인들의 영역이었다. 당연히 “우리 형제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거지?”라는 불만이 잦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검든 희든 파랗든 빨갛든 노랗든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연주를 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마찬가지로 “색소폰을 입에 대면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는 콜트레인을 영입하면서 데이비스는 자신의 약점을 영민하게 보완했다.
‘재즈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할까. ‘카인드 오브 블루’가 재즈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것은 코드(chord) 변화를 극도로 절제하고 단순화한 역발상 덕분이기도 했다. 당장 단 두 음의 반복에서 출발하는 첫 곡 ‘소 왓(So What)’부터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악보에도 도입부만 간단하게 한두 줄 적혀 있거나 아예 악보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전통적 장·단조의 구분도 희미해졌고 다음 수순이나 결말을 짐작하기 힘든 모호성이 커졌다. 에번스는 이 음반의 즉흥성을 일본의 수묵화에 비유하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이 음반은 “거세게 몰아치는 재즈의 급류에서 늘임표 같은 존재”였다.
이들의 의기투합은 폭발적이었지만 지속성은 짧았다. 그 뒤 콜트레인은 종교적 차원으로 재즈를 끌어올리며 구도자로 불렸지만 41세에 별이 되고 말았다. 반대로 데이비스는 록 음악과 재즈를 융합한 ‘퓨전 재즈’를 개척하며 ‘재즈의 카멜레온’으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서문에서 “광막(廣漠)한 우주의 입자들이 우연히 충돌하듯 한자리에 모여 찬란한 빛을 발하더니 그 후 각자의 길로 흩어져 저마다 불멸의 재즈 거장이 된 과정을 되밟아보는 이야기”라고 명쾌하게 요약했다. 그런 의미에서 1959년은 재즈가 가장 화려하게 명멸(明滅)했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이 책 역시 후반으로 갈수록 아름답지만 처연한 정서를 지니게 된다.
[김성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