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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든, 80대든 “오늘이 꿈 이루기 가장 좋은 날”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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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든, 80대든 “오늘이 꿈 이루기 가장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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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노인의 꿈’ 주역 손숙·이일화
9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웹툰 원작 연극 ‘노인의 꿈’에서, 자기 영정을 직접 그리고 싶은 81세 ‘춘애’(손숙·오른쪽)와 50대에 들어선 미술학원 선생 ‘봄희’(이일화)는 세대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손숙은 ‘춘애’처럼 말했다. “세상 모든 봄희들, 움츠러들지 말아요.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예쁜 시기니까.” /수컴퍼니

9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웹툰 원작 연극 ‘노인의 꿈’에서, 자기 영정을 직접 그리고 싶은 81세 ‘춘애’(손숙·오른쪽)와 50대에 들어선 미술학원 선생 ‘봄희’(이일화)는 세대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손숙은 ‘춘애’처럼 말했다. “세상 모든 봄희들, 움츠러들지 말아요.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예쁜 시기니까.” /수컴퍼니


무대 위 배우는 조명을 받아 빛나고, 무대 뒤 인간은 세월에 익어 깊어진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9일 막을 올린 연극 ‘노인의 꿈’은 그 세월의 두께가 다른 두 여자가 만나 서로의 주름을 어루만지는 이야기다.

동명 웹툰(2023)이 원작. 웃는 모습으로 자기 영정을 직접 그리고 싶은 81세 할머니 ‘춘애’(김영옥·김용림·손숙)가 팍팍한 현실에 치여 꿈을 잊고 살던 50세 미술학원 원장 ‘봄희’(하희라·이일화·신은정)에게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면서 우연한 동행이 시작된다. ‘춘애’ 역의 배우 손숙(82)과 ‘봄희’ 역의 이일화(55)를 최근 대학로 연습실에서 만났다.

◇귀로 새긴 대사, 마음이 그린 그림

10년째 황반변성을 앓아온 배우 손숙은 이제 시력이 약해져 눈으로 대본을 읽을 수 없다. 사전에 녹음해 놓은 대본을 귀로 들으며 외운다. 연극 배우 출신인 제작사 수컴퍼니 박수이 대표가 정성을 다해 녹음했다. “매일 밤 적어도 두 시간은 꼭 들었어. 마음에 찰 때까지 100번 넘게 듣고 또 듣다 보니 어느 순간 글자가 아닌 감정이 훅 들어와요.” 손숙은 “어쩌면 남들보다 두 배의 노동이지만, 폐 끼칠까 봐, 노인네가 와서 질척거린다는 소리 들을까 싶어 더 열심히 했다”며 웃었다. 그 웃음 뒤에 평생 “연기는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 믿으며 무대에 선 노배우의 꼿꼿함이 있다.

연극 '노인의 꿈'의 '봄희'와 '춘애' 포스터. 위 사진부터 이일화·김용림, 김영옥·하희라, 신은정·손숙. /수컴퍼니

연극 '노인의 꿈'의 '봄희'와 '춘애' 포스터. 위 사진부터 이일화·김용림, 김영옥·하희라, 신은정·손숙. /수컴퍼니


이일화 배우가 “그런데도 선생님은 누구보다 먼저 대본을 다 외우셨다. 정말 존경스럽다”고 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뽀글머리 엄마부터 표독스러운 재벌 사모님까지 연기 폭이 넓은 배우. 그는 “실은 연기 시작은 1991년 대학로 연극 ‘굿 닥터’ 무대였다”고 했다. 요즘도 ‘미저리’(2022) ‘분장실’(2023) ‘슈만’(2023·2024) 등 연극 무대에 자주 선다. “매체와 무대 연기는 정말 많이 달라요.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2016)를 했을 때 완전히 인물에 집중해 미친 듯 연기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50대, 가장 예쁠 때… 움츠러들지 마”

손숙은 “대본을 받았는데 동화처럼 따뜻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다 너무 착하더라”고 했다. 이일화도 “처음 제안받고 웹툰을 먼저 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고 했다.

극 중 봄희는 갱년기 우울에 시달린다. 브랜드 입시 미술 학원과 경쟁이 붙어 수강생은 줄고, 사춘기 딸과도 사이가 멀어지며 바람 잘 날이 없다. 봄희의 고민은 이일화에게도 남 일이 아니다. “늘 목표를 향해 달리기만 했지, 내려놓는 법은 몰랐어요. 봄희를 만나면서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처음 고민하게 됐습니다. 조금씩 비워내고 주변을 안아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봄희처럼 말하는 이일화를 바라보며, 손숙이 춘애처럼 웃었다. “봄희 나이, 50대가 여자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예요. 젊어선 그걸 모르지. 돌아가신 백성희 선생님이 그런 말 하실 때 나도 못 알아들었으니까. 지나고 보니 그때가 황금기야. 뭐든 할 수 있고, 다시 꿈꿀 수 있는 나이. 그러니 세상 모든 봄희들, 움츠러들지 말아요.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예쁜 시기니까.”

연극 '노인의 꿈'에서 '봄희'의 완고한 아버지 '상길'을 맡은 남경읍, 박지일, 김승욱(위 왼쪽부터)과 자상한 남편 '채운' 역의 강성진, 윤희석, 이필모(아래 왼쪽부터). /수컴퍼니

연극 '노인의 꿈'에서 '봄희'의 완고한 아버지 '상길'을 맡은 남경읍, 박지일, 김승욱(위 왼쪽부터)과 자상한 남편 '채운' 역의 강성진, 윤희석, 이필모(아래 왼쪽부터). /수컴퍼니


연극엔 현실의 가시도 숨어 있다. 봄희가 완고한 아버지 ‘상길’(남경읍·박지일·김승욱)에게 묵은 원망을 쏟아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일화는 “세상 모든 딸과 아버지에게 이 연극이 뒤늦은 사과이자 화해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늙어감은 소멸 아닌 완성”

극 중 춘애는 자신의 영정을 그리면서도 시종 유쾌하다. 늙어가는 처연함보다 소풍을 앞둔 아이 같은 설렘이 더 크다. 손숙은 “할머니한테 내가 많이 배운다. ‘아, 이렇게 갈 수도 있겠구나,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하니 요즘 이 할머니를 만나는 게 즐겁다”고 했다. 그에게 늙음은 소멸의 과정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긴 연극을 잘 마쳐가는 ‘완성’의 길이다.


이일화는 “함께 연습할수록 ‘선생님을 닮고 싶다, 선생님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어떻게 이 어려운 세상 힘든 세상을 잘 견뎌오셨을까, 지금 선생님 연세까지 이렇게 세상을 잘 살아오신 분들을 보면 너무너무 귀하고요. 그 삶에 진짜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존경스럽고.”

◇“여든 넘어도 ‘막내’는 즐거워”

연극 '노인의 꿈'의 '춘애' 역 김영옥, 김용림, 손숙(왼쪽부터). /수컴퍼니

연극 '노인의 꿈'의 '춘애' 역 김영옥, 김용림, 손숙(왼쪽부터). /수컴퍼니


손숙은 김영옥(89), 김용림(86)과 함께 ‘춘애’를 맡았다. “두 분 다 나보다 훨씬 건강하고 아주 그냥 씩씩하셔. 요새 그 할머니들 보면 신나. 내가 막내거든, 하하.” 이일화는 “희라 언니가 있어서 너무 안심이 된다”고 했다. “며칠 전에 언니가 무대 등·퇴장부터 어떤 소품을 들고 들어가고 가지고 나가야 하는지 종이 한 장에 손글씨로 빼곡히 써주셨어요. 은정이는 정말 고와요. 연습할 때도 그냥 얘기할 때도 참 곱고 예뻐요.

연극 '노인의 꿈'의 '봄희' 역 하희라, 이일화, 신은정(왼쪽부터). /수컴퍼니

연극 '노인의 꿈'의 '봄희' 역 하희라, 이일화, 신은정(왼쪽부터). /수컴퍼니


무대 위 ‘춘애’와 ‘봄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의 상처를 껴안으며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간다. 어쩌면 손숙과 이일화도 그렇다. 시력을 잃어가는 노배우는 후배의 호흡에 귀 기울이고, 후배 배우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길을 찾는다. 두 배우는 관객에게도 이 연극이 그렇게 다가가길 바란다. 공연은 3월 22일까지, 5만5000~7만7000원.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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