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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냐고요? 집안일 도맡는 ‘전업자녀’입니다”

조선일보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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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냐고요? 집안일 도맡는 ‘전업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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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중국에서 한국으로 번진
2030 ‘전업자녀’ 현상
일러스트=유현호

일러스트=유현호


#1. 경기도 성남에 사는 A(39)씨는 대학원을 나온 뒤 직장을 구하지 않았다. 취직하라는 부모의 성화에도 그는 집을 지켰다. 한때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가게 일을 도왔지만, 3년 전 아버지가 가게를 접으면서 그 일마저 사라졌다. 요즘 A씨의 하루는 식사 준비와 집 안 청소, 반려견 산책 등으로 채워진다.

#2. 서울의 대기업에서 일했던 B(30)씨는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오랜 서울 생활로 심신이 지쳤다는 그는 부모님을 ‘보좌’하며 지낸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시는 부모님을 배웅하고, 청소·빨래 등 집안일을 하거나 심부름을 다녀온다”고 했다. 부모님 병원 예약, 식재료·생필품 온라인 주문, 택배 수령, 고장 난 가전제품 AS 맡기기 등도 그의 몫이다.

‘전업자녀’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전업주부’나 ‘전업 투자자’란 말은 익숙하지만, 전업자녀는 낯설다. 시사상식사전(박문각)에 따르면, 전업자녀는 ‘직장이 없는 자녀가 집 안 청소와 식사 등을 전담하고 부모에게 월급을 받는 것을 이르는 신조어’다. 2023년 최악의 청년 실업률을 기록한 중국에서 등장한 말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이 표현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자조로, 일부는 유희로 사용한다. 전업자녀 외에도 ‘홈 프로텍터’ ‘자택 경비원’ 등의 말이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반려견 산책’부터 ‘밑반찬 만들기’까지

지난해부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에는 한국 전업자녀들의 브이로그(Vlog·자신의 일상생활을 동영상으로 만든 인터넷 게시물)가 쏟아졌다. 가족을 위해 요리하고, 어머니가 시킨 심부름을 다녀오거나 아버지 대신 운전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들은 놀고먹으면서 부모 속을 썩이는 ‘등골 브레이커’와는 다른 면모를 강조한다.

유튜버 김모(26)씨는 지난해 ‘전업자녀 생존기’ 등 수십 편의 브이로그를 올렸다. 영상 속 김씨는 요리와 설거지, 청소, 바느질 등 집안일을 하느라 바쁘다. 돼지갈비찜, 쇠고기 미역국으로 어머니 생일상을 차리고, 아버지의 목과 어깨를 안마하는 모습도 담겼다. 영상에는 전업자녀들의 공감 댓글이 쏟아졌다. “같은 전업자녀로서 반성합니다. 너무 많은 직무 유기를 하고 있었네요” “3일 정도 파업했는데 눈치 보여서 다시 청소기 잡습니다” “프로 전업자녀로서 많이 공감됐습니다. 저의 일과는 설거지, 밥 짓기, 청소기 돌리기, 빨래 개기 등등. 오늘 하루 (부모의) 잔소리가 없었다면 전업자녀 의무 완벽 수행한 날!”

소셜미디어에는 전업자녀들의 ‘인증샷’도 올라온다. “야밤에 만들었다”며 감자채볶음과 소시지볶음, 멸치볶음 사진을 올리거나,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맞아 케이크를 준비하고 “결혼해줘서 고마워 집주인 부부”라는 문구를 덧붙이는 식이다.


전업자녀 가운데는 집안일을 하면서 자기 계발이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이가 적지 않다. 지난해 다니던 회사가 폐업해 집에 머물게 됐다는 C(31)씨는 “집안일을 하면서 자격증 공부와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고, 언젠가는 다시 사회생활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시간도 지금뿐일 것 같아, 나름대로 열심히 전업자녀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고 말했다. 반면 전업자녀 상태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려는 이도 더러 있다. 대학원 졸업 뒤 10년 가까이 전업자녀로 생활해 온 A씨는 “연로해지는 부모님을 모시면서 이대로 살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전업자녀들이 올린 브이로그 캡처. /유튜브

전업자녀들이 올린 브이로그 캡처. /유튜브


◇“가족 더 화목해졌다” vs. “울화가 치민다”

전업자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취직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청년이 가족 내 역할을 맡으며 버티는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삶의 방식을 포장한 표현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30대 전업자녀를 둔 김모(58)씨는 “(딸에게) 용돈을 그냥 주는 것보다 집안일을 맡기는 편이 서로 덜 불편하다”며 “딸이 스스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집안일을 맡으면서 가족이 더 화목해졌다”며 “(딸이) 이렇게 잠시 재충전한 뒤 다시 사회로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무직 상태이면서 집안일도 안 하는 30대 아들과 함께 산다는 60대 최모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는 것보다 전업자녀가 훨씬 낫다”며 “요즘같이 취업이 힘든 세상에 그 정도라도 하고 있다면 아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본다”고 했다. 60대 이모씨도 “오히려 돈 버는 게 쉬운 일이고, 가족 내조는 아무나 못한다”고 전업자녀를 두둔했다.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30대 전업자녀를 둔 박모(66)씨는 “아들만 보면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그는 “전업자녀는 백수를 미화하는 말”이라며 “멀쩡하게 낳아 대학까지 보내놨는데, 왜 직장도 구하려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업자녀 관련 콘텐츠에는 “30대쯤 되면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데, 정말 철없다” “취업 경쟁, 회사 다니기는 싫고 부모에게 기생하고 싶다는 것 아니냐” “기댈 수 있는 부모가 있는 운 좋은 백수에 불과하다” 같은 댓글이 줄을 잇는다.


◇“자녀도, 부모도 어쩔 수 없는 선택”

과거에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자녀를 뜻하는 신조어는 많았다.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족’, 무직이면서 교육이나 직업 훈련을 받지도 않는 ‘니트(NEET)족’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 용어들이 ‘의존’ 상태에 초점을 맞췄다면, 전업자녀는 가족 안에서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사회적 직업은 없지만, ‘집안일’이라는 구체적인 노동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와는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업자녀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중국의 연구들은 이 현상을 개인의 나태함이나 태도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회 구조와 문화적 문제로 본다. 중국 학술지 ‘베이징청년연구’(2024)에 실린 논문 등에 따르면, 전업자녀는 치열한 취업 경쟁과 높은 주거비·생활비 부담 같은 사회경제적 환경, 부모의 과도한 보호와 정서적 개입 아래 성장한 세대적 특성이 맞물리며 나타난 결과로 설명된다.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도 일정 수준의 삶의 질을 유지하려는 욕구, 생계 책임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을 합리화하는 경향도 배경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효(孝)를 물질적 부양이나 희생이 아닌, 함께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변화 역시 전업자녀 확산의 배경으로 꼽힌다.

전업자녀가 한국 사회에서 늘어나는 이유 역시 중국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현실과 강력한 가족 중심 문화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청년 고용 지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전업자녀 대부분은 정부 통계상 ‘쉬었음’ 인구(특별한 사유나 교육·훈련 없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 속할 가능성이 큰데, 작년 11월 기준 20대 ‘쉬었음’ 인구는 40만5000명, 30대는 31만4000명이었다. 특히 30대는 2003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래 최대 규모였다. 20~30대 쉬었음 청년은 71만9000명으로, 취업 준비자(51만1000명)나 실업자(35만9000명)보다 많았다.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청년층(25~34세) 쉬었음 인구 가운데 자발적 쉬었음은 28%, 비자발적 쉬었음은 72%로 나타났다. 취업 지연이나 경력 단절 같은 자녀의 생애 위기를 부모가 함께 감당하는 경향이 강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모와 자식 세대 간 경제적 격차가 크게 벌어졌고, 부모가 자녀에게 몰입하는 정도 역시 과거보다 훨씬 심해졌다”며 “취업이 어려운 현실에서 자녀는 독립을 미루고 부모는 그런 자녀를 도와주려는 선택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녀는 집안일이나 생활 편의 정보 제공 등 나름의 방식으로 부모에게 보답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구 교수는 “다만 전업자녀 현상이 확산돼 장기화할 경우 사회적 문제가 커질 수 있어 우려된다”며 “결국 해법은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에 있다”고 말했다.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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