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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가 보내는 신호

조선일보 김영미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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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가 보내는 신호

서울맑음 / -3.9 °
[아무튼, 주말]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 (15)
햇무리를 보기 위해 몸에서 스키와 썰매를 풀고 몇 걸음 앞을 향해 걸어간 후 뒤를 돌아봤다. 지금도 남극을 떠올리면, 저 햇무리를 바라보던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김영미 제공

햇무리를 보기 위해 몸에서 스키와 썰매를 풀고 몇 걸음 앞을 향해 걸어간 후 뒤를 돌아봤다. 지금도 남극을 떠올리면, 저 햇무리를 바라보던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김영미 제공


(2024.11.22 / 운행 15일 차. 위도 82도 18분 / 누적 거리 286.35㎞ / 해발고도 903m)

해가 떴다. 파란 하늘에 햇무리가 선명하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 또렷한 원을 그린 햇무리는 지면과 거의 닿아 보였다.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폴짝 뛰면 손에 잡힐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가깝게 보였다. 하늘이 맑아서일까? 오랜만에 일광욕을 하니 몸이 ‘통~’ 하고 튀어 오를 것만 같다. 아침에 침낭 안에서부터 온몸이 보송보송해져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다. 덕분에 82도를 넘던 어제와 15일 차인 오늘 연속해서 24㎞를 걸었다. 다리는 좀 묵직해도 단단하게 힘이 붙은 듯하여 이제 몸이 리듬을 좀 찾은 느낌이다. 운행을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으니 썰매의 무게도 대략 15㎏ 정도 줄어든 셈이다. 바람도 잠시 호흡을 멈췄고 속도가 붙으니 걷는 게 행복했다.

태양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그림자가 돌아왔다. 그림자는 해시계의 나침반이 된다. 오후 2~3시 사이엔 스키가 내 그림자를 밟고 간다. 이 시간엔 나침반도 필요 없으니 그림자를 밟고 가는 시간은 마음이 가장 고요하다. 태양은 오전 8~9시 사이에 출발할 때는 왼쪽 어깨에 있고, 등 뒤를 돌아 운행을 마치는 저녁 6~7시 무렵엔 오른쪽 어깨에 머문다. 해는 24시간 내내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나를 중심으로 반타원형을 그리며 온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풍경은 360도를 회전해도 파란 하늘과 설원의 수평선뿐이다. 똑같은 풍경 속에서 해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내 발을 기준으로 그림자만이 이동한다. 걷다 보면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 것처럼 계속 같은 자리를 제자리걸음하는 것만 같다. 이게 참 기분이 묘한데, 남극이란 공간에서만 경험하고 자극받을 수 있는 감각이다.

2023년 남극점까지 가는 동안엔 등 뒤로 비치던 햇무리를 본 기억이 한 번도 없다. 뒤를 돌아보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 봐 앞만 보고 걸었다. 시간에 쫓겼고 체력은 부대끼고 몸은 통증으로 울었으니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남극인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커서 남극점에 도달하고도 아쉬웠다. 이번엔 걷다가 한 번쯤 뒤돌아 햇무리를 바라볼 여유를 꼭 챙기고 싶었다. 인생에서 이런 풍광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2013년 가을 암푸 1봉이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등반이었다. 히말라야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풍광이 있다. 그 차고 맑은 청량한 대기 속에서 빛나던 산과 너무도 조화롭던 하이 캠프(7000m대의 정상 아래 마지막 캠프)에서 바라보던 일몰의 풍경이다. 웅장한 대자연의 스케일에 압도당하던 기분. 찬 공기가 폐를 주물러대는데, 깨끗한 공기 맛에 심장은 왜 더 뜨거워지던지! 도시에서 히말라야가 그리울 때면 그 일몰의 장면이 떠오른다. 여전히 가슴이 벅차오르고 목이 멘다. 그곳이 수직의 세계였다면, 이번에는 수평의 세계로 방향이 전환됐다. 남극이 그리울 때면 아마도 저 햇무리를 바라보던 순간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 같다.

햇무리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눈이 반사를 일으켜 생긴다. 햇무리가 생기면 바람이 시작되고 날씨가 안 좋아지는 패턴을 보였다. 남극은 사막기후라 적설량이 적어 새로 눈이 내리기보다 기존의 눈이 바람에 날리며 햇무리가 만들어지고, 이것은 곧 화이트아웃(눈보라 등으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이 올 것이란 경고의 메시지다. 그러니 햇무리에는 폭풍 전야의 평온함 같은 묘한 긴장감이 사방을 감싸 안는 냉랭함이 있다. 모든 풍광이 꽁꽁 얼어 정지된 것 같지만 미세한 것들이 내 감정을 조물락거리며 쥐고 흔든다. 날씨가 짓궂어지기 전 남극점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라는 신호다.

※아시아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김영미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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