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7일 서울 시내의 한 쿠팡 물류센터 모습. /연합뉴스 |
고용노동부 류현철 산업안전보건본부장(차관급)은 지난 8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한 연구에 대해 “야간 택배노동 건강연구의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썼다. 전날 본지가 ‘야간 택배 기사 10명 심박 수 측정해 놓고, 與 새벽 배송 제한 근거로 내놔’라는 기사에서 고용노동부 의뢰로 작성된 연구용역 보고서의 부실을 지적하자, 연구자를 감싸며 칭찬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 연구가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다. 연구를 잘해서가 아니라, 15조원 규모인 새벽 배송 시장을 제한하려는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근거로 삼기에는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분명하면, 부실해도 시금석이 되는가.
이 연구는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신뢰도를 좌우하는 표본이 전체 야간 배송자의 0.1%도 안 되는 단 10명의 심박 수·혈압 측정 결과에 불과하다. 혈압 측정은 4명에 그쳤고 이 중 수면 중 혈압이 상대적으로 덜 떨어져 ‘문제’로 분류된 이는 겨우 2명이었다.
과소 표본은 연구의 목표인 ‘심박 수·혈압과 노동 시간의 인과관계’를 불명확하게 만든다. 신체 지표는 측정 당시의 심리나 상황뿐 아니라 일의 숙련도, 작업 환경 등 수많은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 10명은 이런 변수들을 통제할 수 없는 숫자다. 단 2명의 몸 상태를 근거로 야간 노동 시간을 주 40~46시간으로 제한하겠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이 연구를 주도한 교수는 2021년에도 표본 선정의 오류로 지적을 받았다. 택배 업무 실태 조사를 진행하며 특정 노조 소속 대상만 주로 뽑아 연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회사에 비우호적인 의견을 가질 확률이 높다. 그런 사람에게 또 연구 용역을 맡긴 책임자가 바로 류 본부장이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라는 의문은 그가 쓴 글을 보고 풀렸다. 류 본부장은 “충분한 시간과 연구비를 드릴 수 있었다면 더 훌륭한 연구를 이뤘을 것”이라고 적었다. ‘택배 사회적 대화 기구’를 끌고 가는 여당과 정부는 새벽 배송 제한 주장을 밀어붙일 과학적 근거가 반드시 필요했다. 실제 민주당은 지난달 29일 이 결과를 듣고 “노동 시간이 과로사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발표했다. 시금석이라는 단어는 자신들의 목표에 부합하는 결과를 제시해 준 데 대한 보상으로 들릴 뿐이다.
우리 사회에는 사정에 따라 야간에 일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근로 계약 형태가 다양한 것도 저마다 형편이 다르기 때문이다. 논의 당사자인 야간 배송 노동자 대부분이 노동 시간 제한을 원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택배 기사 209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야간 배송 시간을 40~46시간으로 제한할 경우, 54.4%는 ‘투잡을 구하겠다’고 응답했고 35.9%는 ‘다른 직업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남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면서, 건강을 되찾아주겠다며 시금석을 세우는 행위는 정책 결정자가 할 일이 아니다.
[김아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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