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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신춘문예] AI 시대의 공간형 설치미술이 제기하는 ‘지각의 정치성’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전을 중심으로

조선일보 강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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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신춘문예] AI 시대의 공간형 설치미술이 제기하는 ‘지각의 정치성’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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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공간형 설치미술이 제기하는 ‘지각의 정치성’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전을 중심으로





1. AI 이후, 감각의 조건을 묻는 예술

AI는 더 이상 예술을 둘러싼 부차적인 기술이 아니다. 이미지와 언어, 기억을 생산하고 저장하는 주체의 일부가 기계로 넘어간 지금, 예술은 그 변화를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감각 기관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기억한다고 믿는 것들 사이에는 언제나 알고리즘이 개입한다. 인간의 눈이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풍경, 실존하지 않았던 장면, 없었던 목소리가 그럴듯한 서사와 함께 재생산된다. 이때 예술은 현실을 재현하는 거울이라기보다, ‘지각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실험하는 장치로 이동한다. 문제는 이 실험의 전제가 더 이상 인간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기억 역시 같은 위기를 겪는다. 기억은 오래도록 내면의 다른 이름처럼 여겨졌지만, AI 시대의 기억은 외부 장치와 결합된 혼성 구조로 작동한다. 개인의 경험은 기기의 기록 형식과 데이터베이스의 구조 속에 저장되고, 다시 불려 나올 때마다 새로운 조합으로 재편된다. 스티글레르가 말했듯,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기억의 외재화[3] 구조이기도 하다. 이때 기억은 더 이상 온전히 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기록이며, 무엇이 알고리즘의 추론인지 구분하는 일은 점점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내가 보았다’, ‘내가 기억한다’라고 말한다. 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미 상당 부분 허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 지점에서 설치미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AI가 기억과 지각의 조건을 비가시적 기술 환경 속에서 재편한다면, 예술이 이 변화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형식은 ‘환경 자체를 감각 조건으로 제시하는’ 설치미술일 것이기 때문이다. 설치미술은 화면이나 개별 오브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공간 전체를 하나의 감각 환경으로 조직한다. 관객은 더 이상 작품 앞의 해석자가 아니라, 감각의 한가운데에 놓인 존재가 된다. 동선, 거리, 음향, 빛, 체감 밀도는 모두 지각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동하고, 감각은 인식 이전의 안정된 토대가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는 관계가 된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몸-주체’는 여기에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공간 속을 이동하는 관객의 상태로 드러난다. 지각은 인식 이전의 결정된 틀이 아니라, 몸과 세계의 접촉 속에서 계속해서 조정되는 관계라는 점이, 설치미술 안에서는 물리적 체험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b. 1980)의 《적군의 언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 전시는 명확한 서사도, 중심도, 해석의 지침도 제공하지 않는다. 관객은 빛과 소리, 구조물과 잔해들 사이를 통과하며 스스로 감각의 중심을 구성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관객은 입장과 동시에 이야기의 앞과 뒤를 잃고, 어디가 중심인지,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야의 구도가 바뀌고, 같은 사운드도 다른 방향에서 들려온다. 익숙한 내러티브 구조 대신, 불안정한 감각의 연속이 전시 경험을 구성한다. 이때 관객이 체험하는 것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감각 체계 자체의 흔들림이다.

이 흔들림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다. 라투르의 언어를 빌리자면, 《적군의 언어》의 공간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4]들이 얽힌 하나의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조각, 파편, 소리, 조명, 동선, 그리고 그 안을 통과하는 관객의 몸이 모두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전시를 구성하는 질서 역시 인간 주체가 미리 설계한 명료한 의미 구조라기보다, 여러 요소가 얽혀 만들어 내는 비인간적 질서에 가깝다. 관객은 이 질서 속에서 중심이 아니라 노드[5]가 된다. 그 결과, 세계를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지각은 잠시 유보되고, 지각을 둘러싼 조건들이 전면에 떠오른다. 우리가 세계를 읽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를 통과하는 감각의 통로를 시험하는 셈이다.

AI 시대는 이런 설치적 상황을 기술 차원에서 이미 넓게 구현하고 있다. 추천 알고리즘이 구성하는 타임라인, 필터가 변형하는 얼굴, 자동 완성이 예측하는 언어는 각각 작은 전시 공간처럼 작동한다. 사용자는 자신이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이미 구성된 환경을 통과하는 데 그칠 때가 많다. 《적군의 언어》는 이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고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하나의 미적 환경 속에 놓음으로써 지금 나를 둘러싼 질서가 인간의 감각을 기준으로 조직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감각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 경험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해 온 인간 중심의 지각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적군의 언어》가 제기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인간은 여전히 세계를 자신의 감각으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 우리는, 비인간적 질서를 중심으로 개편된 감각 환경 속에서 다만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한가. AI가 이미지·언어·기억의 생산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시대에, 로하스의 공간형 설치는 관객을 ‘정보–감각–서사’의 붕괴 지점에 세우며 현대적 지각 자체를 다시 묻는다.

2. 폐허와 파편의 감각 구조 — 로하스 작업의 지속적 모티프와 존재론적 불안

로하스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감각은 늘 파열과 불완전성, 그리고 폐허의 질감 속에 놓여 있다. 그는 미래를 기술적 진보나 유토피아의 형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문명 이후에 남겨질 잔해, 공증되지 않은 흔적, 용도를 잃은 파편의 형태를 통해 미래를 상상한다. 그의 조각과 설치는 완결된 결과물이기보다, 시간이 이미 한 차례 지나간 세계의 잔존물처럼 보인다. 형태는 남아 있으나, 인과와 목적은 소거되어 있다.

이러한 폐허의 감각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세계를 감각하는 하나의 모델에 가깝다. 로하스의 조각에서 균열과 비정형, 파편화된 질감은 인간이 의지해온 의미 구조의 붕괴를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관객은 이 표면 앞에서 해석을 시도하지만, 그 시도는 매번 지연된다. 조각은 설명을 허락하지 않고, 관객은 의미의 확신 대신 감각의 미결정성 속으로 진입한다. 이 지연의 경험 속에서 지각은 더 이상 기호를 해독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확실한 상태 그 자체로 작동한다.


2층 전시실 한가운데 놓인 대형 조각은 폐허의 감각을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콘크리트 덩어리와 금속 파이프, 자동차 부품으로 보이는 잔해, 절단된 전선과 플라스틱 파편이 한 덩어리로 굳어 있는데, 그 사이로는 말라붙은 진흙과 소금기 어린 하얀 결정이 층층이 끼어 있다. 주변의 나무들은 천장에서 자라난 듯이 이질적인 감각을 선사한다. 어디선가 뽑혀 나와 이곳으로 옮겨진 기계의 잔해 같기도 하고, 먼 미래의 발굴 현장에서 막 건져 올린 화석 같기도 하다. 무엇이 먼저였는지, 어떤 기능을 수행하던 물질이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조각은 ‘사용되던 것’의 신분을 잃고, 단지 시간과 환경이 남긴 잔류물로써만 존재한다. 관객이 이 덩어리를 바라볼 때 떠오르는 것은 정교한 상징 해석이 아니라, 기능과 서사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감각이 무엇을 붙잡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로하스의 작업에서 폐허는 망가진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세계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장치다. 조각 앞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질문은 이 대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기보다, 나는 지금 이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에 가깝다. 이때 조각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의미를 잃은 세계 앞에서 인간의 지각이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를 시험하는 실험 장치로 전환된다.

로하스가 폐허를 하나의 감각 모델로 사용하는 태도는 오랜 시간 일관되게 이어져 왔다. (2013) 연작에서 그는 미래의 폐허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잔해로 제시한 바 있다. 그곳에서 조각과 구조물은 기능을 상실한 기계 부품, 쓸모를 잃은 도구, 정체를 알 수 없는 잔여물처럼 흩어져 있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설명되는 대상이 아니라, 이미 한 차례 작동을 멈춘 세계의 표면이다. (2017)에서 이 경향은 한층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인류의 흔적이 지워진 무대 위에는 서사의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으며, 관객은 오직 사라진 사건의 공백과 그 이후에 남아 있는 배치만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두 작업에서 폐허는 단순히 파괴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세계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확인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적군의 언어》는 이 계보 위에서, 폐허를 특정 사건 이후의 상태가 아니라 애초에 의미와 서사가 정착할 수 없는 지각의 조건 자체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곡점에 놓인다. 여기에서 폐허는 더 이상 과거의 잔해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한다는 확신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상태, 즉 감각이 출발하는 자리이자 동시에 끊임없이 좌절되는 자리로 확장된다.


전시실의 잔해들은 스스로의 기원을 숨기며 눈앞에 놓인다. 마치 시간 자체가 파손된 것처럼, 형태는 있지만 존재의 이유는 지워져 있다. 관객은 그 지워진 이유를 유추하거나 복원하려 하지만, 그 복원은 끝내 실패한다. 이 실패는 감각을 다시 불러온다. 설명보다 먼저 찾아오는 낯섦, 불편한 촉감, 잔여물의 생명감… 이러한 정서적 경험이 바로 로하스 작업이 말하고자 하는 언어다. 《적군의 언어》는 이 계보 위에서, 폐허를 더 이상 특정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지각의 조건 자체가 붕괴된 상태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곡점에 놓여 있다.

이 지점에서 폐허는 단순히 망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었던 시간을 지나 이제 인간의 감각이 확실한 기준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장치가 된다. 폐허는 해석 이전의 감각, 의미가 부재한 공간, 서사가 없는 물질의 현상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 앞에서 ‘왜 이 조각은 이런 형상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 하지만, 결국 질문 자체가 방향을 잃는다. 오히려 더 적합한 질문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로하스의 조각은 과거의 흔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인간이 어떤 지각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업에는 언제나 ‘언어의 해체’가 겹쳐 있다. ‘적군의 언어’라는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여기에서 언어는 소통의 매개라기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구조로 등장한다. 조각은 말하기보다 침묵에 가깝고, 배열은 설명이 아니라 질문을 발생시킨다.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의미가 미끄러지는 장면으로 변한다. 언어 중심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 관객에게 이 공간은 익숙한 문법이 통하지 않는 낯선 어휘처럼 다가온다.

이 낯섦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주체라는 오래된 전제를 흔든다. 인간은 오랫동안 의미의 구조를 생산하는 존재, 세계에 이름을 붙이고 서사를 부여하는 존재로 자신을 정의해 왔지만, 로하스의 조각들은 그 의미 작용을 좀처럼 수용하지 않는다. 의미가 스며들 자리를 갖지 못한 채 버티는 물질과 파편 앞에서, 관객은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의미 부여의 실패를 체험하는 신체로 남는다.

로하스의 폐허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조각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서사적 축을 제거한 채, 시간의 잔여만을 현재화한다. 관객은 이전이나 이후가 아니라, 의미가 중단된 시간의 틈에 머문다. 이때 질문은 더 이상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로 이동한다. 시간은 서사가 아니라 감각이 된다.

지상 1층의 바닥 전체가 흙과 자갈로 덮인 낮은 단은 전시실 바깥 공간과 연속적인 공간처럼 높이가 맞추어져 있다. 검게 그을린 나무 조각과 녹슨 금속 파편 사이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식물들이 흙을 비집고 올라오고 있다. 온·습도 제어 장치가 멈춘 전시장 안에서 이 흙은 외부의 공기와 같은 리듬으로 마르고 젖기를 반복하며, 식물의 잎과 줄기에는 미세한 먼지가 얇게 내려앉는다. 전등의 빛과 전선의 잔해, 콘크리트 조각의 그레이 톤 사이에 놓인 이 작은 초록색은 ‘회복’의 징후라기보다, 멸종과 계승 사이의 중간 지점처럼 보인다. 인간이 정비한 정원의 풍경이 아니라, 폐허의 미세한 균열 틈에서 우발적으로 솟아난 생태계의 단면인 것이다.

감각이 오작동하고, 시간의 순서가 뒤엉키며, 의미가 부유하는 공간. 그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세계의 주석자가 아니다. 세계는 그저 앞에 놓이며, 인간은 그 세계를 통과하는 존재가 된다. 로하스의 작업은 이 지점에서, AI 시대의 지각 구조와 미묘하게 겹친다. 기술 역시 폐허처럼, 인간이 이해하던 서사적 질서와 구조를 해체하며 작동한다. 우리가 응시하고 있다고 믿는 세계는, 이미 여러 차례 조합과 편집을 거친 이미지이며, 뒤섞인 기억의 잔여일 수 있다. 무언가의 원본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감각은 이 실패 속에서 다시 깨어난다.

결국 로하스의 폐허는 세계의 파괴된 모습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질서가 소거된 이후에 남는 감각의 단면이다. 관객은 이 단면 앞에서 의미를 찾는 대신, 의미가 부재한 상태 그 자체를 경험한다. 《적군의 언어》는 AI 시대의 지각 조건을 미리 예감하게 하는 감각적 형상이며, 의미를 잃은 세계 앞에서 인간의 지각과 존재를 다시 묻는 최전선이다.

3. 환경적 동선과 비인간적 질서 — 감각을 재배치하는 공간

《적군의 언어》에서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것은 조각도, 텍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길을 잃은 감각에 가깝다. 이 전시는 특정한 오브제 하나가 주제를 대표하는 구조가 아니라, 관객의 몸이 움직이는 경로 자체를 작품의 핵심 축으로 삼는다. 여기서 동선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감각적 훈련이자 지각의 재배치다. 관객은 ‘입장—노출—혼란—재조정’이라는 네 단계의 흐름을 거치며, 인간 중심적 해석 체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몸으로 확인한다.

계단 벽면은 마감되지 않은 콘크리트와 오래된 페인트 자국이 뒤섞인 상태로 남아 있고, 긴 천이 창문을 가리고 있다. 난간 너머로는 바로 아래층의 장면들이 예상치 못한 각도로 엿보인다.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정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계속해서 몸의 각도와 시선의 높이를 조정해야 한다. 계단은 단순히 층과 층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라, 수직으로 겹쳐진 감각의 레이어들을 통과하며 자신의 위치를 재설정해야 하는 좁은 실험실처럼 작동한다.

로하스가 동선과 환경을 작품의 핵심 축으로 삼아 온 것은 《적군의 언어》에서 갑자기 등장한 전략이 아니다. 그는 일찍부터 조각을 독립된 오브제가 아니라, 관객의 몸을 둘러싼 환경의 일부로 배치해 왔다. ((2013) 연작에서 관객은 흩어진 잔해들 사이를 걸으며, 어디가 작품의 중심인지, 무엇이 전시의 정면인지 스스로 가늠해야 했다. (2017)에서는 건축적 구조와 조각, 조명, 동선이 하나의 무대처럼 결합되어, 관객이 무대 밖에서 구경하는 위치가 아니라 이미 사건이 지나간 공간을 배회하는 존재로 설정된다.

이들 작업에서 공간은 더 이상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중립적인 그릇이 아니다. 오히려 공간 자체가 하나의 행위자처럼 관객의 시선과 동선을 조정하며, 감각의 리듬을 결정한다. 《적군의 언어》는 이러한 환경적 실험을 한층 더 밀어붙인다. 여기에서 전시장은 조각을 배치하기 위한 배경이 아니라, 관객이 길을 잃고 다시 감각의 기준을 세워야만 하는 비인간적 질서의 장으로 구성된다. 즉 이전 작업들에서 이미 예고되었던 ‘환경 = 작품’이라는 명제가, 이번 전시에서 ‘환경 = 감각을 흔드는 질서’라는 더 급진적인 형태로 완성되는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그 흔들림이 시작된다. 기존의 폐쇄된 입구 대신, 옆에 놓인 계단을 따라 내려간 관객들을 맞이한 전시장은 전통적 미술관의 질서—설명이 쓰여진 흰 벽, 조명, 작품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제거한다. 어두운 바닥, 글씨가 흘러내린 단조로운 벽면, 을씨년스러운 풍경으로 구성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익숙한 감각의 좌표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낀다. 작품 앞에 선다는 기존의 관람 방식은 무력해진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던 듯한 강당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면, 빛이 들어찬 작품은 특정 지점을 향해 전시되지 않고, 구조물과 그림자, 바닥 질감에 파묻혀 서로 얽혀 있다. 흙이 가득찬 공간에서 관객은 어느 방향에서 무엇을 먼저 바라봐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다. 동선은 안내되지 않고, 서사는 부여되지 않는다. 이 비(非)지시적 상황은 관객이 몸으로 세계를 읽어내는 방식 자체를 바꾸도록 강요한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간이 관객에게 ‘정면’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 앞면과 뒷면, 중요 대상과 주변부의 구분이 사라진다. 어느 조각은 공간의 모서리에, 어떤 구조물은 천장보다 높은 어둠의 틈에 떠 있다. 관객은 시선을 끊임없이 전환하며, 충분하지 않은 조명과 불완전한 거리감 속에서 사물을 더듬듯 확인해야 한다. 동선은 관객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그 선택이 의미 있는 방향을 제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관객이 선택한 길이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믿는 감각이 끊임없이 의심받는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게 만든다. 감각의 주체였던 인간은, 공간이라는 낯선 질서 앞에서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설치미술은 원래 환경적 감각을 구성하는 매체지만, 이 전시가 남다른 이유는 환경이 곧 질서라는 점이다. 공간은 형태를 보여주는 무대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일종의 생태적 규칙망처럼 작동한다. 음향이 특정 조각을 향해 집중되지 않고, 어느 지점에서는 먼 울림처럼, 또 다른 지점에서는 불규칙한 진동처럼 들린다. 동일한 소리라도 공간의 재질, 벽의 텍스처, 관객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음향 경험으로 변한다. 조명이 비추는 방향과 밝기도 고르게 유지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은 과도하게 밝고, 또 어떤 곳은 시야 확보가 어렵도록 어둡다. 이 불균질한 공간체계는 이미지의 전체 구조를 보여주기보다, 정보와 감각이 파편적 신호로만 경험되는 상황을 조성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환경적 경험이 AI적 알고리즘의 작동 조건을 시각적으로 모사한다는 점이다. 알고리즘은 전체 구조를 의도적으로 숨기지 않는다. 그 대신, 데이터라는 조각들을 서로 연결하고 재조합해 결과를 산출한다. 사용자에게는 결과만 주어질 뿐, 그 결과가 어떤 연산 과정과 판단 체계를 거쳐 나왔는지 알기 어렵다. 《적군의 언어》의 공간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각은 여러 신호들—광원, 그림자, 표면 질감, 조각의 파편들—의 간헐적 조합을 통해 인식될 뿐, 그 전체 구조와 생성 규칙은 추론 불가능한 상태로 남는다. 관객은 대체 무엇이 이 공간을 이렇게 구성했는가 라는 질문을 갖지만, 그 원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의 블랙박스처럼, 공간은 감각을 통해 접근할 수 있지만 결코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또한 이 환경은 서사가 아닌 상황을 제공한다. 시간은 흐르지만,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각은 정지되어 있지만,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음향의 방향과 조명, 체감 온도, 공간의 밀도는 관객의 동선과 시선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전통적인 감상 방식—작품의 기원과 의미를 해석하는 행위—와 충돌한다.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대신, 관객은 읽을 수 없음의 상태를 견디며 감각을 조정해야 한다. 동선을 바꾸고, 시야를 회복하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스스로 의미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은 감각을 다시 구성하는 행위이자, 감각이 세계를 판단한다는 믿음을 재검증하는 경험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치는 더욱 불안정해진다. 인간은 더 이상 모든 관계의 중심에서 의미를 해석하고 부여하는 주체가 아니다. 메를로-퐁티의 언어를 다시 떠올려 보면, 몸은 세계를 읽어내는 시작점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의해 조직되는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군의 언어》의 공간에서 관객의 몸은 분명 어떤 중심을 갖고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은 공간의 내적 규칙과 우발적 상황들에 따라 계속 수정된다. 즉, 몸은 지각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환경에 반응하며 감각을 갱신당하는 존재가 된다. 공간은 관객을 통과하는 신호가 되고, 관객은 세계가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 속에서 자신의 감각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비인간적 질서 속에서 언어와 기억은 다시 흔들린다. 목적이나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조각의 배열 앞에서, 관객은 자신의 기억 속 조각 정보들을 들춰본다. 비슷한 형태, 본 적 있는 재료, 익숙한 기능… 하지만 어느 것도 정확한 해석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전시는 기억이 지각을 바로잡아주는 장치가 아니라, 지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증거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과정은 AI가 데이터를 조합해 결과물을 생성하는 방식과 미묘하게 겹친다. 데이터의 출처와 구조를 온전히 알 수 없듯, 전시 공간 역시 조각과 환경의 기원을 숨긴 채 감각적 신호만 제공한다. 관객은 자신이 경험한 감각을 해석하려 하지만, 감각은 확실한 의미로 응답하지 않는다.

결국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핵심은, 《적군의 언어》가 서사적 의미나 시각적 감동을 제공하는 전시가 아니라, 감각을 어떻게 의심하게 하는가를 시험하는 환경이라는 점이다. 동선은 관객의 감각을 계속 바꾸어 놓고, 조각의 위치와 형태는 해석의 단서를 확실하게 주지 않으며, 음향과 조명은 불균형과 낯섦을 유발한다. 이 환경 속에서 관객은 세계를 ‘읽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질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지각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로하스의 전시는 AI 시대와 가장 날카롭게 맞닿는다. 정보의 흐름과 알고리즘적 조합이 감각의 경로를 설계하듯, 《적군의 언어》는 관객의 경험을 조직하면서도 그 원리를 숨기고, 감각의 주권이 흔들리는 순간을 등장시킨다. 인간은 판단의 중심이 아니라, 판단의 조건을 다시 검증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전시는 감각이 확실한 통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매개이며, 세계가 내 감각을 경유해 나를 구성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한다.

《적군의 언어》의 공간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세계를 본다고 믿지만, 세계가 먼저 우리를 조직하고 있다.

관객은 조각과 구조물 사이를 지나면서 이 말을 체험한다. 감각은 더 이상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환경 속에서 계속 갱신되고 조정되어야 하는 미결정의 상태다. 《적군의 언어》는 AI적 재현·기억 생산 체계가 파생하는 감각적·서사의 붕괴를 전시장 환경으로 재현함으로써, 관객의 지각적 순간을 정치적·윤리적 판단의 자리로 전환한다. 설치는 단순한 메타포가 아니라 지각의 실험장이다. 이 깨달음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예술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묻고 있는 근본적인 지점을 드러낸다. 《적군의 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가 아니라, 무엇에 의해 보게 되는지를 해석보다 먼저 몸의 경험으로 앞세우는 전시다.

4. AI 시대의 지각 조건, 그리고 예술이 수행해야 하는 감각적 회복

전시가 만들어내는 낯섦은 단지 조각의 형태나 공간 구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언어와 판단의 권한이 인간으로부터 조금씩 이탈하고 있다는 감각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데서 온다.

AI는 인간의 언어를 학습해 재조합하고, 알고리즘은 거대한 데이터 속에서 세계의 패턴을 예측한다. 그러나 그 내부 구조를 우리는 볼 수 없다. 《적군의 언어》가 구축한 비가시적 질서, 끝없이 감각을 의심하게 만드는 환경은 이러한 AI 시대의 지각 조건을 그대로 반향한다. 전시장 안에서 관객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중심이라 여겨야 하는지 단번에 확신할 수 없다. AI의 학습 구조가 인간의 지각을 닮은 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궤도를 따라가듯, 이 전시 역시 친숙한 감각의 틀을 흉내 내면서도 그 틀을 조금씩 비껴 나간다.

이 충돌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지점은, 관객이 보고 있다고 믿는 순간 곧바로 조건화된 결과를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따라붙는 국면이다. 전시장은 조각과 구조물, 음향과 빛, 동선과 질감을 서로 충돌시키며 감각을 안정된 상태에 두지 않는다. 관객의 몸은 언제나 무언가에 부닥치거나 미끄러지며, 시선과 청각, 거리감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틀어진다. 이때 감각은 더 이상 명료한 인지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와 신체가 맞부딪치는 힘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들뢰즈가 말한 감각의 자리는 바로 이러한 충돌의 현장에 가깝다. 《적군의 언어》는 이 힘의 흔적을 관객의 몸 위에서 극대화함으로써, 감각이 정리된 인식이 아니라 ‘진행 중인 충돌’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한다.

이 전시는 또한 조각, 구조물, 음향, 재질, 빛, 동선, 그리고 그 사이를 움직이는 관객의 신체를 하나의 복합적 행위자로 엮어낸다. 누군가가 모든 요소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의미를 통제하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관객에게 주어지는 것은 불완전한 단서들뿐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음향이 공간을 지배하다가, 또 다른 지점에서는 미세한 빛의 변화나 바닥 질감이 경험의 핵심이 된다. 여기서 관객은 더 이상 ‘환경을 지배하는 주체’라기보다, 비인간적 요소들과 끊임없이 협상하고 반응하는 하나의 노드가 된다. 인간이 세계를 관리하는 중심이 아니라, 비인간적 사물·환경과 더불어 행위자로 엮인 존재라는 라투르의 관점이 이 전시의 공간 구성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적군의 언어》는 인간과 비인간이 엉킨 네트워크 속에서, 감각의 주도권이 어디에 놓이는지를 조용히 뒤집어 보인다.

이 과정에서 언어와 의미는 반복해서 실패한다. 관객은 자신이 경험한 감각을 설명하려 하지만, 구체적인 장면을 말로 옮기려는 순간마다 어딘가 빠져나가는 잔여가 남는다. 동선을 따라 걸어 나왔지만 전체 구조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고, 분명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그 충격을 단일한 개념으로 붙잡지 못한다. 《적군의 언어》가 제공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도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적 사건들의 연속이다. 리오타르가 말한, 표상과 개념의 틀 안으로 끝내 수렴되지 않는 감각의 순간—언어와 의미보다 앞에 있는 감각의 충격—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감지된다. 전시는 관객을 이 언어적 실패의 국면에 오래 머물게 하면서, 그 실패 자체를 예술 경험의 핵심으로 밀어 올린다.

동시에, 이 전시는 효율과 목적, 기능의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 잉여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조각과 구조물들은 어떤 서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낭비된 에너지나 과잉된 형태, 쓸모를 알 수 없는 잔여물처럼 서 있다. 공간 구성 역시 합리적 동선이나 명료한 정보 전달 구조를 따르기보다, 비효율적이고 우회적인 길들을 만들어낸다. 이때 전시는 AI의 계산적 규칙 바깥에 남는 영역—목적에 의해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초과와 낭비의 공간—을 복원한다. 바티유가 말한 인간 존재의 ‘잉여적 힘’은 바로 이런 비효율과 과잉 속에서 드러난다. 《적군의 언어》는 기능을 상실한 조각의 잔여와 목적 없는 동선을 통해, 계산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세계의 힘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AI가 언어를 다루고 이미지를 생성하며, 인간의 기억 형식을 점점 더 세밀하게 흉내 내더라도, 감각의 불확실성과 육체적 미세함을 대신 경험할 수는 없다. 전시는 감각의 취약성과 모호함, 실패의 순간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감각의 자리를 다시 인간에게 되돌려준다. 감각은 더 이상 확신을 보증하는 근거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묻는 출발점이 된다. 기계가 제공하는 선명한 결과값이 아니라, 흔들리는 몸이 남긴 감각의 잔여가 우리가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로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적군의 언어》는 조각을 보여주는 전시라기보다, AI 시대의 조건 속에서 인간의 감각과 언어가 어디까지 밀려났는지를 시험하는 미학적 실험이다. 동시에 그것은 감각을 회복시키는 의례이기도 하다. 지각의 혼란, 동선의 불확실, 언어의 무력함을 끝까지 감당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감각한다는 일의 무게를 다시 체감한다. 기술이 지각의 조건을 재편하는 시대에, 예술은 그 조건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불완전성과 잉여를 드러내며 인간 경험의 자리를 다시 여는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적군의 언어》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역할의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 전시 앞에서 다시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무엇에 의해 보게 되는가.

그 질문이 계속 남아 있는 한, 감각은 아직 인간에게 귀속된 마지막 언어로 남아 있다.

5. 지각의 재정치화와 예술의 역할

《적군의 언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불안은 단순히 낯선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늘 자명하게 받아들여온 지각의 기준—언어적 해석, 의미 중심의 서사, 인간의 중심성—이 사실은 하나의 설정값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서 나온다. AI 시대의 감각 환경은 이 기준들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교란하며, 우리는 알고리즘이 재조합한 이미지와 자동 생성된 문장 패턴을 자연스러운 언어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시대적 조건 속에서 《적군의 언어》는 예술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감각적으로 증명한다.

전시는 언어적 이해와 서사적 구조를 지워둔 채, 관객을 감각의 흔들림 속에 세운다. 이는 감각을 기능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신, 감각이 발생하는 조건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기 위한 장치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 판단의 근거가 얼마나 취약한지 체험하는 일이 바로 이 전시의 핵심 경험이다. 관객은 의미의 폐허에서 감각을 다시 발견하고, 감각의 불완전성 속에서 인간이 가진 반응과 사유의 힘을 확인한다. 감각이 세계를 해석하는 출발점이라면, 그 감각이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를 다시 느끼게 된다. 그 흔들림은 불안이면서, 동시에 지각이 아직 인간에게 귀속된 영역임을 확인하는 마지막 근거이기도 하다. 조각의 표면을 더듬듯 바라보다가, 구조물 사이의 공기를 감지하고, 공간의 울림이 신체를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세계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나가는 ‘감각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 경험은 AI 시대에 예술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 역할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기술과 경쟁하거나 기술을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감각의 조건을 다시 묻는 일이다. 기계가 시뮬레이션한 이미지와 언어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감각의 충돌과 설명되지 않는 틈은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는다. 예술은 바로 그 틈에서 인간의 존재를 다시 호출한다. AI가 정교한 결과를 제시할수록, 예술은 결과가 아닌 경험, 해석이 아닌 감각, 확신이 아닌 의심을 제안해야 한다. 《적군의 언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이 기술 시대에 수행할 가장 중요한 역할을 선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하스는 AI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나 도식적 논평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의지해온 언어와 의미, 기억과 해석의 틀을 조용히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관객이 감각을 다시 가동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지각의 정치성을 새로 구성하는 실험이다. 세계가 인간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감각하고,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미래 기술과 예술의 관계를 넘어, 세계를 경험하는 인간적 조건 자체를 사유하게 만든다.

감각은 인간의 마지막 언어이며, 예술은 그 언어가 아직 남아 있음을 시험하는 공간이다. 기술이 인간을 넘어서는 시대일수록, 예술은 감각을 다시 정치화하고, 인간 존재의 자리를 묻는 질문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AI 시대의 예술은 기술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감각이 아직 여전히 인간의 것임을 확인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전시는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조건이 뒤바뀐 시대에서, 예술이 무엇을 다시 수행해야 하는지를 묻는 하나의 선언이다. 우리는 이 선언 앞에서 다시 질문하게 된다. 누가 세계를 기억하고, 누가 언어를 만들며, 누가 감각을 경험할 권리를 갖는가. 《적군의 언어》는 이 질문을 관객의 경험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1] 정치성은 감각, 지각, 공간, 신체 등을 포함하는 삶의 조건 전체가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재편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2]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개인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2025.9.3-2026.2.1., 아트선재센터 (서울 종로구)

[3] 기술이 발전하며 인간의 내면적 기억은 기술 매체(디지털 아카이브, 데이터베이스 등)에 이전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억의 생존 방식과 경험 구조는 변화하고 있다.

[4]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에서 행위 능력을 가진 모든 비인간 주체들을 의미한다. 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과 연결되며, 김수진은 ANT 위상 공간으로서의 박물관을 자체 행위자로서 논의한 바 있다. 여기에서의 비인간 행위자는 작품 그 자체라는 점에서 김수진의 논의와는 구분되는 지점이 존재하지만, 박물관을 ANT의 맥락에서 읽는 시도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김수진. (2020).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으로 살펴보는 박물관학: 뮤지엄을 둘러싼 인간/비인간 행위자의 끊임없는 ‘번역’. 박물관학보, 39, 263-296.

[5] 인간·비인간을 가리지 않고 사회적·물질적 작용자로 간주되는 존재 단위. 사람·물체·장치·환경 등이 모두 행위자(actor)로 기능할 수 있으며, 이들의 결합이 하나의 네트워크(network)를 이룬다.

[강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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