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AFP] |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모디가 트럼프 전화기에 4번 이상 ‘부재중’ 뜨게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모디 총리가 이를 모두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며 그 이유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 모아진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이 26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몇 주간 무려 4차례 이상 모디 총리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모디 총리가 불응했다고 전했다. 언뜻 보기에는 모디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화를 돋구는 모양새다.
FAZ는 “지금까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관세 분쟁에서 모든 상대편을 박살내왔으나 인도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며 트럼프의 협박을 계기로 인도가 이웃 강대국인 중국과의 오랜 악연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인도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트럼프의 협박은 인도 정부 수장인 모디 총리에게는 ‘과거의 치욕’을 상기시키는 일이라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트럼프는 왜 인도 총리에 전화한 것일까.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인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면서 모디 총리와의 협상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4일 일본의 영문 매체 ‘닛케이 아시아’는 인도의 외교 전문가들을 익명으로 인용해 “트럼프가 최근 타협을 시도하기 위해 모디와 통화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모디가 계속해서 통화를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트럼프의 짜증이 더 커졌다”고 보도했다.
지난 2월 13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로이터] |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점 등을 문제삼아 인도산 상품에 대한 관세율을 기존 25%에서 50%로 높이겠다는 행정명령에 지난 6일 서명했다. 이 방침은 예고를 거쳐 27일부터 시행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 CNBC 방송에 “그들(인도)은 전쟁 기계에 연료를 공급해주고 있다. 만약 그들이 그런 일을 할 것이라면 나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19일 CNBC 인터뷰에서 인도가 구매한 석유 중 러시아산의 비중이 우크라이나 전쟁 전에는 1% 미만이었으나 지금은 42%로 치솟았다고 지적했다. 또 “인도가 전쟁을 틈타 이득을 챙기는 이런 상황은 미국 정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기간에 중국의 석유 구매 중 러시아산의 비율은 13%에서 16%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 인도 외무장관은 양국 사이의 무역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러시아산 원유를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유럽연합(EU)도 구매하는데 미국 측이 인도만 문제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인도산 상품 중에서도 인도 공장에서 생산되는 아이폰 등 스마트폰은 예외 품목으로 지정돼 50% 관세율 적용을 받지 않는다.
미국의 무역협상 대표단이 25∼29일 인도 뉴델리 방문 일정을 잡았다가 취소해버린 점도 양국간 무역분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당최 양국의 무역 갈등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다.
지난 25일(현지시간) 인도 아그라의 한 생산시설에서 노동자들이 가죽 신발을 만들고 있다. [AP] |
인도에게 상기되는 ‘과거의 치욕’, 그 정체는 무엇일까?
모디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협조적인 이유로 ‘과거의 치욕’이 거론됐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도의 과거 역사를 짚으며 모디 총리의 통화거절을 다음 3가지 요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1) 1991년 IMF 구제금융
인도는 1991년 경제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매우 불리한 조건 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강제로 집행한 바 있다. 이때 경험이 국가 주권이 외세 압력 앞에 굴복한 ‘치욕’으로 각인됐다는 설명이다.
1991년 인도 경제 위기는 현대 인도 경제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외환보유액이 사실상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 직전까지 갔다는 평가가 다시 나왔다. 재정적자·대외차입에 더해 1990년 걸프전으로 인한 유가 급등, 수출시장 일부 상실, 해외송금 위축 등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때 인도 정부는 IMF에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했다. 인도는 유동성 확보를 위해 금 67톤을 해외에 담보로 제공하기도 했다. 6억3900만 달러(약 8933억원) 규모의 단기 대출을 위해서다. 1991년 5월, 인도국립은행은 UBS에 20톤의 금을 환매조건부채권(repo) 계약으로 매각하여 2억3400만 달러(약 3271억3000만원)를 조달했다. 7월에는 인도 중앙은행(RBI)이 영란은행과 일본은행에 금 47톤을 공급하며 4억500만 달러(약 5661억9000만원) 규모의 대출을 확보했다. 이는 매각이 아닌 담보 대출이었다. ▷인도 루피화 절하(1991년 7월) ▷사전 인허가제 완화 ▷공공부문 역할 축소 ▷산업에서의 FDI 허용 확대 ▷금리 자유화 ▷건전성 규제 도입 등 구조개혁도 추진됐다.
급격한 개혁은 국민 다수에게 물가상승, 실업 증가 등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는 상처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IMF 등 서구 열강의 압력에 주권이 훼손되고 국제사회 의지에 굴복한 치욕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 선적(국기) 로스네프트 소속 원유 운반선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지난 2023년 7월 6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고 있다. [로이터] |
(2) HCQ 수출 전면금지 번복
2020년 4월 인도는 코로나19 대유행 대응을 위해 자국 내 의약품 수급을 고려하여 하이드록시클로로퀸(HCQ)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이 약물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치료의 ‘게임체인저’로 적극 홍보하며 미국 내 공급을 원하는 상황이었다. 급작스레 미국은 인도의 수출금지 결정으로 공급이 차단될 처지에 놓였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만약 인도가 HCQ 수출을 허용하지 않으면, 미국도 ‘보복’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압박했고, 모디 총리와 직접 통화해 이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통화 후 며칠 뒤 인도 정부는 코로나19로 심각한 피해를 본 나라(사실상 미국)에 대해 HCQ 수출제한을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인도 외무부는 “인도 내 수급이 보장되는 한에서 인도 주변국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나라에 인도적 차원에서 수출을 허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도 정치권과 여론에서는 “인도가 미국의 대놓고 위협섞인 압박에 굴복했다”는 비판과 함께, 국가주권을 훼손당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인도 정부는 공식적으론 ‘인도적 조치’라고 강조하며 미국 압박 때문이 아니라고 해명했으나, 국제사회와 현지 언론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보복’ 표현 이후 번복한 점에 주목했다.
(3) 모디 총리의 리더십에 미칠 영향 우려
모디 총리의 정치적 스탠스와도 맞지 않는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모디 총리는 ‘강한 인도’를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다. 그런데 미국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고율 관세를 부과하거나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이를 인도 정부가 수용한다면, 모디 총리의 리더십에 상처가 날 수 있다는 평가다. 모디는 연설에서 자급자족, 내수산업 보호, 반도체·배터리·항공엔진·비료 등에서 기술 자립을 수차례 강조해왔다.
모디는 이달 중순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미국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인도) 농민·어민·축산업 종사자의 이익을 해치는 어떠한 정책에도 ‘벽처럼(stand like a wall)’ 맞서겠다”, “인도는 그들의 이익에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never compromise)”고 밝혔다. 이는 대미 무역협상에서 굴욕적 수용을 경계하는 메시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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