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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지방 소주’의 쇠락

조선일보 이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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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지방 소주’의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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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대구 사람이 서울 와서 소주를 시키자 ‘참이슬’이 나왔다. “아지메, 이거 말고 참소주 주이소”라고 하자, 식당 주인이 “이거 진짜 소주”라고 대꾸한다. 손님은 대구·경북 지역 대표 소주 브랜드인 금복주의 참소주를 주문했던 것이다. 한국 음주인들의 ‘솔(soul·영혼)’ 격인 소주는 지역마다 별도 브랜드가 있다. 이른바 지역 소주다. 부산·경남에 대선소주, 광주의 잎새주, 제주의 한라산 소주 등이다.

▶13세기 몽골 침략 때 전해진 소주는 원래 안동소주처럼 증류주였다. 하지만 요즘 우리가 즐기는 소주는 희석주다. 정부미, 보리 등에 카사바, 고구마 등 전분질을 함께 발효시킨 뒤 연속 증류해 만든 주정(酒精·에탄올 함량 95% 이상)에다 물을 섞어 희석시킨 것이다. 주정 자체엔 맛과 향이 없어 희석할 때 감미료와 첨가물을 넣는데 여기서 소주마다 미세한 맛 차이가 난다.

▶지방 소주가 등장한 것은 1973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난립한 소주 업체들의 과당 경쟁을 막고 지역 대표 소주를 키운다며 ‘1도(道) 1사(社)’제를 도입했다. 동시에 주류 판매 업자는 해당 시도의 소주를 일정 비율(1976년 50% 이상) 의무 구매토록 했다. ‘자도 소주 의무 구매제’다. 자유경쟁 침해 논란으로 1991년 없어졌다가 1995년 주세법 개정으로 부활했지만 1996년 위헌 판결로 사라졌다.

▶한때 지방 소주가 서울 공략에 나선 적도 있다. 1993년 강원 소주 업체인 경월소주를 인수한 두산이 ‘그린소주(나중에 ‘처음처럼’으로 통합)’로 수도권 점유율 30%까지 차지했다. 녹색 소주병에 대관령 청정수를 내세운 게 주효했다. 지방 소주가 수도권에서 빛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린 소주는 자도주 보호 규정이 사라지면서 안방 수성에 주력하다 무너졌다. 이후 2010년대 초반 부산·경남의 무학소주가 ‘좋은데이’(16.9도)로 도전했지만 변변찮았다. 한국 소주 시장은 2024년 소매점 기준 ‘참이슬’의 하이트 진로가 58%, ‘처음처럼’의 롯데가 17% 장악하고 있다.

▶“부산 싸람 아이면 마이 묵지 마라.” 한때 부산 소주 시장을 독점할 때 대선소주가 내놓았던 광고 문구다. 자부심에 자신감까지 겹쳐졌다. 그런데 올 상반기 부산에서 대선소주(30%)가 하이트진로(38%)에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뺏겼다. 지방 소주의 마지막 보루마저 뚫렸다는 반응이다. 획일화된 맛과 문화가 넘쳐 나는 시대, 다양성의 상징이기도 했던 지방 소주가 쇠락한다니 소주보다 씁쓸한 맛이 든다.

[이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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