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서독 월드컵부터 취재를 이어온 51년차 일본 축구 칼럼니스트 고토 다케오는 22일 '웹스포르티바'에 기고한 칼럼에서 "K리그는 J리그보다 10년 전인 1983년에 발족했다. (출범은 일본이 늦었지만) 최근 들어 한일 축구 역학관계 역전 흐름이 선명하다. 지난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성적만 봐도 J리그 클럽이 K리그보다 우수했다"고 적었다.
고토는 '리그 출범 과정'에 주목했다. 양국의 가깝고도 먼, 판이한 사회상이 양국 리그 출발선에도 집약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강조했다.
고토에 따르면 1993년 첫발을 뗀 J리그 출범 계기 가운데 하나는 1985년에 치러진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에서의 완패 충격이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과 예선 2경기에서 각각 1-2, 0-1로 졌다.
이때 일본 축구대표팀을 이끌던 고 모리 타카시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김정남 감독과 유소년 시절부터 친교가 깊었다. 모리는 김 감독을 통해 양국의 환경 차이를 알게 됐고 이 해를 기점으로 '자국 리그 전문화' 필요성을 통감했다.
일본 축구계는 1988년 활성화위원회를 발족했다. 1991년 7월에는 일본프로축구리그(J리그) 창설을 공식화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93년 5월, 역사적인 J리그 개막 축포가 열도 하늘을 물들였다.
J리그는 활성화위원회 발족 이후 5년여에 걸쳐 유럽과 미국 프로스포츠 업계를 현지 조사하는 등 치밀한 정지작업을 밟았다. 아울러 연맹 가입 조건으로 일찌감치 법인 독립화와 유스팀 보유, 일정 규모 이상의 경기장 확보를 내거는 등 상당히 높은 문턱을 책정해 장기 발전을 도모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시민 불만을 거두는 수단으로 3S 이용 방침을 세우고 야구계와 축구계에 프로화를 요청했다.
이 요청을 프로화 추진론자였던 당시 최순영 대한축구협회장이 수용하면서 슈퍼리그의 초고속 출범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고토는 "한국의 프로축구는 이렇게 다소 불완전한 형태로 스타트를 끊었고 어느 관점에선 '졸속'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출범이었다"면서 "일본이 만전의 준비 끝에 프로화에 성공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고 짚었다.
"아울러 출범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 (축구계를 넘어) 양국 사회의 차이까지 상당 부문 엿보인다. 한국의 빠른 프로화 배경에는 당시에도 한국 선수는 아마추어 신분임에도 실질적으론 프로에 가까운 유형으로 존재한 영향이 컸다. 이때부터 높은 연봉을 요구하며 홍콩 프로팀에 입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1980년대엔 유럽행을 선언하고 진출하는 선수까지 나왔다"고 돌아봤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프로구단 모체는 자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 수행했지만 1970년대 박정희 집권 시절 급성장한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창업 일가가 절대적 결정권을 쥐고 있어 그들의 '지시' 한 번으로 곧장 프로젝트(프로 축구팀 창단)를 가동하고 완료할 수 있었다. 하나 일본 기업은 하나의 의사 결정에도 사내 협의나 이사회 의결이란 '절차'가 필요해 구조적으로 추진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고토는 "한일 양국의 프로축구 리그는 이렇게 두 사회의 형태가 (총체적으로) 반영돼 발족한 무대다. 다만 두 리그 모두 지금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존재가 큰 자극이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 둬야 할 것"이라며 긴 글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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