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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노인이 될 수 있을까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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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노인이 될 수 있을까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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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역 신안산선 공사현장 심정지 50대 사망
영화 ‘퀴어’. 누리픽처스 제공

영화 ‘퀴어’. 누리픽처스 제공




김은형 | 문화데스크



지난달 말 70대 후반의 노인이 보행자 신호가 켜져 있는 동안 건널목을 미처 다 건너지 못했다가 신호가 바뀐 다음 노인을 보지 못한 차에 치여 숨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가슴이 서늘했다.



신호등이 다리 불편한 노인들에게 아량이 없는 건 어제 오늘 이야기도,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미국 중산층 노년 이야기인 넷플릭스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는 초록불에 6차선 건널목 완주가 불가능해 길 건너 저렴한 뷔페식당을 포기해야 하는 친구를 위해 동네 노인들이 모두 나서 함께 길을 건너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같은 문제의식이지만 이번 뉴스를 보면서 몹시 우울해진 건 사망 사고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뉴스를 보기 3주 전쯤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왼쪽 무릎에 심한 찰과상을 입었다. 트랙을 뛰다 잠깐 도로 쪽으로 나왔는데 조금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 발이 걸린 것이다. 그로부터 2주 뒤에는 잔디 사이에 돌이 깔린 길을 걷다가 돌의 미세한 높이 차이에 걸려 넘어져 오른쪽 무릎 아래가 찢어져서 꿰맸다. 양쪽 다리에 거나하게 붕대와 밴드를 붙이고 무릎을 굽혀야 할 때 쩔쩔매게 된 건 오히려 부차적 문제였다. 전 같으면 덤벙대거나 칠칠치 못하다고 적당히 자책하고 넘어갔을 텐데 그게 안 됐다. 늙어서 운동신경이 이 정도로 둔해진 건가? 혹시 파킨슨병이 아닐까? 영 심란해졌다. 그리고 나는 버스에서 내릴 때 내가 측은하게 보면서도 답답해하던, 노인의 느린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한걸음씩 떼게 됐다. 무릎이 아프기도 했지만 잘못 디뎠다가 다칠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달랑 버스 두 계단에서 잭 스나이더 감독이 울고 갈 과잉 슬로 액션을 연기하게 한 것이다.



노안이 오거나, 완경에 들어섰다거나, 임플란트를 하거나 40대 중반 이후 노화를 체감하는 일들은 많았지만 이번처럼 마음이 위축되기는 처음이다. 달리기를 다시 하기 겁났다. 계단에서는 난간을 꼭 잡았다. 무엇보다 이제 나는 노인이 되어가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구체적으로 와서 우울해졌다. 노년이 되면서 받아들이기 가장 힘든 건 불편해지는 몸이나 삶보다 노인이 된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노화의 증상을 경험하는 것과 노인이 된다는 것 사이에는 뭔가 차원 이동의 의미 전환이 있다. 육체적으로 노화의 신호들이 쌓이기 시작해도 머릿속의 나는 여전히 젊은 나이기 때문이다. 주름 없는 젊은 외모의 내가 아니라 젊었을 적 그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나 말이다. 내가 어릴 때 짐작했던 것과 달리 나이 든다고 음악 취향이 록이나 포크에서 트로트로 바뀌는 일도 없고, ‘젊어서 좌파가 아니면 어쩌구, 늙어서도 좌파면 저쩌구’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치적 성향 역시 나이 들면서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지난봄 국민의힘 대선 경선 때 한동훈의 ‘활약’으로 불거진 영피프티 바람과 조롱을 보며 낄낄거리면서도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이유다. 젊은 세대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게 젊어보이려고 유난을 떠는 발악 또는 주접처럼 보이지만 젊은 시절 그랬듯이 열심히 가꾸고 다듬었던 취향을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거라고 본다. 본질적으로 지금의 이삼십대 힙스터 지망생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취향을 자랑하는 ‘꾸안꾸’ 발악이나 열망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얼마 전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한 영화 ‘퀴어’를 보다가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내 시선을 붙잡은 건 젊은 남성에게 반한 중년 남성 역할을 연기하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돈으로 상대방을 회유할 만큼 부자고 고급 옷을 입는 한량이지만 멕시코의 무더위에 그의 힘없는 머리카락은 항상 볼품없이 땀에 젖어 있다. 반면 크레이그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젊은 남성의 적갈색 머리는 스크린 밖으로 그 탱탱한 탄력이 느껴질 정도로 단단하고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겨져 있다. 자신도 인지 못 하는 사이, 여전히 방종한 젊은 시절의 루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늙음이 너무 절절해서 스크린에다 대고 “오빠 그만 해. 나랑 집에 가”라고 말할 뻔했다.



지금 노인이 될 생각은 없다. 요즘 50대를 노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으니 발악이라고 비난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최근 온 현타가 3차나 5차 정도로 이어지면 그때는 스스로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을까. 영식스티, 힙세븐티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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