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심씨 집안 유씨 딸’이 어때서? 내 페미니즘은 유년시절 움텄다

한겨레
원문보기

‘심씨 집안 유씨 딸’이 어때서? 내 페미니즘은 유년시절 움텄다

서울맑음 / -3.9 °
1960년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기념으로 엄마와 찍은 사진에 돌아가신 생부의 생전 모습을 합성해 만든 가족사진. 2002년 이프의 허은철 아트디렉터 작품. 나는 그렇게라도 아버지와 같은 세상에서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본 적 없는 유씨 아버지(유인웅)와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심씨 아버지(심진섭)라는 두 존재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내 유년시절이 설명된다 하겠다. 필자 제공

1960년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기념으로 엄마와 찍은 사진에 돌아가신 생부의 생전 모습을 합성해 만든 가족사진. 2002년 이프의 허은철 아트디렉터 작품. 나는 그렇게라도 아버지와 같은 세상에서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본 적 없는 유씨 아버지(유인웅)와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심씨 아버지(심진섭)라는 두 존재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내 유년시절이 설명된다 하겠다. 필자 제공


나는 평생을 페미니스트로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날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던건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여성의 인간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여성들을 인간이 아닌 어떤 별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여성에 대한 각종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사람이고 당연히 다양한 여성들이 존재하듯 페미니즘도 다양한 모습을 띠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 언론인으로서 그 다양한 페미니즘 속에서도 1997년 창간된 계간지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통해 ‘욕망의 페미니즘’을 추구했다. 잡지 콘셉트를 아예 ‘여성의 욕망을 아는 잡지’로 정하고 ‘웃자! 놀자! 뒤집자!’라는 이른바 ‘이프 스피릿’에 입각한 공격적(?) 잡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창간호부터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을 특집으로 다뤄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키며 충격파를 던졌다.





6·25전쟁 뒤 태어난 유복녀





그럼 난 언제부터 페미니스트가 되었을까?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경기도 이천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6·25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난 이듬해인 1954년 3월에 태어난 전후 세대이다. 그러나 호적에는 그보다 한해 빠른 1953년 3월로 신고가 돼 있다. 학교에 들어갈 즈음에서야 뒤늦은 출생신고를 하면서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시절에는 출생신고를 잘못해서 생기는 해프닝이 참 많았다. 전후 세대라곤 하지만 전쟁으로 모든 이들의 삶이 짓밟혀 누구 하나 전쟁의 상흔이 얽혀 있지 않은 사람들이 없던 시절이었다.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예외 정도가 아니라 전쟁의 포화를 엄마 뱃속에서부터 직격탄으로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내 어머니 민영남 여사(1928~2009)는 내가 생년은 갑오년(1954년) 말띠이고 생일은 음력으로 정월 스무아흐렛날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나의 생부는 내가 태어나기 한달 전인 1954년 정월 초사흗날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읜 유복녀였던 것이다. 엄마가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학교 교감선생님이었던 아버지 유인웅(1924~1954)씨는 6·25 때 내려온 인민군에게 휴교 결정을 내렸다는 이유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몇년 못 살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낳고 그 애를 키우다 보니 엄마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나의 존재를 알고도 갓 서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심경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마다 새삼스레 더 가슴이 미어졌다. 나이 스물여섯에 졸지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내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친정집이 있던 경기도 여주로 가서 나를 낳았다.



의붓아버지였던 한의사 심진섭씨. 필자 제공

의붓아버지였던 한의사 심진섭씨. 필자 제공




아버지는 심씨인데, 나는 유씨





내 어머니는 내가 서너살 아니면 네댓살일 때 친정아버지의 명령으로 경기도 이천의 한의사였던 심진섭(?~1972)씨와 재혼했다. 장성한 자식들이 있는 집에 나를 데리고 후처로 들어간 것이었다. 내 기억으론 그 심진섭씨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 이름 쓰기를 배우다가 나는 나 혼자만 성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심씨인데 나만 혼자 유씨였던 것이다. 엄마는 그 이유를 묻는 내 질문에 “너는 그 이름으로 지어야 건강하게 잘 산다고 스님이 말했다”고 새하얀 거짓말을 했다.



지금의 초등학교 격인 국민학교 시절 매 학기 초마다 가정환경 조사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아이들이 사는 환경을 이것저것 조사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아주 노골적으로 선생님이 질문하고 그 질문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드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나는 가족관계를 조사했던 것만 지금까지 기억이 나는데, 선생님은 아버지가 친아버지 아닌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아버지와 성이 다른 내가 손을 들어야 마땅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 시절 내내 계속된 가정환경 조사 시간이면 얼굴에 불볕이 쏟아져 내리는 듯 화끈거리고 안절부절 불편했지만 나는 6년 동안 단 한번도 손을 든 적이 없다.



반 아이들도, 선생님도, 나도 우리 모두 유숙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내가 심진섭 한의원집 딸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당시 심진섭 한의원은 사람들이 줄지어 진료를 기다리는 읍내 제일의 유명 한의원이었고, 일제시대 병원이었던 우리 집 현관에는 심진섭 한의원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서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니던 친구들 대부분은 유숙열과 간판의 심진섭씨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은 나의 주홍글씨였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손을 들지 못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사람을 나쁜 아버지로 만들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친아버지가 아닌 의붓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어야 했는데 내 아버지 심진섭씨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고 우리는 사이가 아주 좋았던 것이다. 심씨 아버지는 왕진을 갈 때도 내 손을 잡고 나를 데리고 갔고, 매일 저녁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나를 데리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만화영화 피노키오도 보고, 또 남자들이 말을 타고 여자들을 낚아채 가는 무시무시한 서부영화도 보고, ‘미워도 다시 한번’, ‘모자초’ 같은 한국영화도 보았다. 거기에다 아버지는 또 용돈도 잘 주는 좋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나는 친아버지 아닌 사람은 손을 들라는 선생님에게 어깃장을 놓듯 친아버지가 도대체 뭔데? 나더러 어쩌라고? 난 친아버지 따위 필요치 않아! 하는 심정으로 손을 들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의 기준과 맞지 않을 때 손을 들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일부종사 못한 죄인’…왜?





내 어머니, 민영남 여사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내 엄마는 과부재혼금지법(조선 성종 때인 1477년부터 실시된 법으로 고종 때인 1894년 갑오개혁법에 의해 폐지됐다)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는데도 재혼한 것을 무슨 죄라도 지은 듯이 여겼다. 엄마 스스로 ‘일부종사 못한 죄인’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어린 시절 ‘일부종사’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엄마를 ‘죄인’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엄마는 왜,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스물여섯살에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됐는데 다시 시집을 간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그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의 시어머니인 호랑이 할머니는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낭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시조를 읊어대시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나의 페미니즘은 그렇게 재혼한 것을 평생 한으로 품고 죄인처럼 산 내 엄마를 위한 변명이면서 동시에 나와 성이 다르지만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나의 계부를 향한 사랑 고백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 아버지가 아무리 잘해주었다 해도 내 어린 시절이 꽃시절만은 아니었다. 세상은 부모가 모두 가려주고 품어줄 수 있는 둥지 속이 아니었다. 그러면 나는 성이 다른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뎠을까? 그것은 책과 신문, 그리고 친구들 덕분에 가능했다.



어느 날, 아마도 읽기를 깨친 초등학교 2,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친구 집에 갔다가 그 집에 있던 동화책 ‘인어공주’를 발견했다. 그 책을 빌려와서 보았는데 동화가 무엇인지 안데르센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나에게 ‘인어공주’가 안내한 바닷속 세상은 신비와 경이, 그 자체였다. 그때까지 바다를 한번도 보지 못했던 나는 활자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상의 충격으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나는 ‘인어공주’ 이래로 활자가 안내하는 세상에 내 마음을 온통 빼앗긴 책벌레가 되었다.



1960년대였던 그 당시에는 책을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서점에서 책 대여도 했다. 책 한권 빌리는데 5원이었고 나는 그 시절 아버지가 매일 용돈으로 주시던 10원을 대부분 책 빌리는 데 썼다. 학교 갔다 오면 매일 책을 읽었는데 해가 지는 것도 모르고 가까이 놓고 책을 보고 또 밤이면 그만 자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방문을 담요로 가리고 방안에서 전등으로 책을 비추며 밤을 새우다시피 책을 읽곤 했다.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은 뜻밖의 부작용을 낳았는데 급격하게 눈이 나빠져 나는 중학생 때 이미 고도근시가 됐다.





유숙열 | 나이 서른을 넘긴 1980년대 중반부터 극렬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