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호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
변진호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
그러나 최근 넷플릭스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는 K컬처의 경계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작품은 K팝 아이돌 그룹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국적 이미지와 감수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제작과 기획은 미국에서 이루어졌으며, 한국인 창작자나 아이돌 산업과의 실질적인 연관성은 제한적이다. 한국의 이미지와 K팝의 문법을 차용했지만, 이 콘텐츠를 과연 K컬처로 볼 수 있을까?
이 사례는 오늘날 K컬처가 더 이상 한국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디까지를 K컬처로 규정할 수 있을까? ‘한국성(K-ness)’은 점차 국적과 무관하게 조합되고, 글로벌 자본과 플랫폼에 의해 다양한 이미지로 재생산된다. 그 결과 K컬처는 단일한 문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스타일이자, 브랜딩 코드처럼 작동하게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K컬처를 어디까지 ‘우리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K컬처의 본질은 한국적인 것에 있는가, 아니면 한국을 연상시키는 감수성과 상품성의 결합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문화 주체성과 산업 전략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인 논의다.
혼란은 K컬처가 지닌 ‘이중 구조’에서 비롯된다. K컬처는 글로벌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작동한다. 세계의 팬들이 매력을 느끼는 지점과 한국 창작자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지점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간극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K컬처의 성공은 일시적 유행으로 소비되고 사라질 위험이 있다.
또한 K컬처는 ‘트랜스 브리콜라주(trans-bricolage)’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국경을 넘어 혼합되고, 새로운 콘텐츠로 재창조되는 현상이다. 이제 K컬처는 초국가적 감성과 자본, 기술이 융합된 복합적 산물이며, 한국인만의 전유물이라 보기 어렵다.
비서구 문화가 서구 세계에서 유행한 사례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복식과 예술을 수용한 ‘튀르케리’와 청나라 도자기와 미술을 동경한 ‘시누아즈리’가 인기를 끌었다. 19세기 ‘자포니즘’은 일본의 전통 판화인 우키요에가 서양 인상주의 미술에 영향을 끼친 사조였다. 모두 이국적 미학이 서구 문화를 자극했던 사례다. 그러나 이 문화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조했다. 오늘날의 K컬처가 이들과 다른 경로를 걸을 수 있을지는 우리가 어떤 전략과 비전을 갖고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K컬처는 결정적 전환기에 서 있다. 이 흐름을 지혜롭게 이끌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콘텐츠의 구성 요소를 세밀하게 분석해 글로벌 감성을 자극한 요인과 진정성 있게 수용된 특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둘째, 창의성과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K문화 운영 체계의 구축이 요구된다. 셋째, 한국은 단순한 콘텐츠 생산국을 넘어 21세기 ‘문화 실리콘밸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글로벌 문화가 실험되고 교차하는 플랫폼으로도 진화해야 한다.
K컬처는 지금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한국적 맥락을 잃은 채 공허한 상징만 남을 수도 있다. 우리가 ‘K’라는 이름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이 만들어낸 가치와 의미의 총합이며, 우리가 앞으로도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정교하고 통찰력 있는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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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호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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