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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자문화 유적지에 선 사유의 기둥 [김용석의 언어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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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자문화 유적지에 선 사유의 기둥 [김용석의 언어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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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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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 철학자



신문 용어로서 칼럼(column)은 특별한 데가 있다. 단어의 원래 뜻은 원주 또는 두리기둥이다. 그 이미지에서 신문 용어가 탄생했다. 영자신문에서 세로로 길게 뻗은 난의 배열을 지면 레이아웃 방식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이 원주의 이미지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칼럼은 이런 레이아웃 방식의 각 난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 난에 실린 글 역시 가리키게 되었다.



우리말 신문은 초기에 세로쓰기를 했기 때문에 지면의 난은 오히려 가로로 누운 기둥의 형태처럼 보였다. 1980년대 말부터 일간지들이 본격적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하면서 우리 신문도 세로로 된 지면 난을 갖게 되었다. 글쓰기 양식으로서 칼럼이라는 용어도 이와 더불어 널리 쓰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칼럼은 라틴어 ‘콜룸나’(columna)에서 유래한다. 둘레와 높이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원주를 뜻한다. 이는 콜룸나와 같은 뿌리를 지닌 단어 ‘콜루멘’(columen)이 높은 곳, 꼭대기, 절정 등을 의미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석조 건축의 전통이 깊은 고대 서구 문명에서 원주는 실용적으로도 중요했고, 상징적으로도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이는 그리스 로마 건축에서 열주를 사용한 신전과 공공건물 그리고 단일 원주로 된 공적비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두리기둥의 중요성은 서구 역사를 배우면서 도리스, 이오니아, 코린토스식 등 기둥머리의 양식까지 각별히 공부했던 학창 시절의 추억에도 남아 있다.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 유적으로 남아 있는 석조 건물터에서도 우리는 두리기둥의 특별함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과 로마의 공회장(Forum)에서뿐만 아니라, 그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유적지에서 경험할 수 있다. 폐허가 된 석조 건물에서 벽과 지붕은 사라졌어도 원주는 우뚝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수직으로 서서 죽은 듯한 자태는 숭엄하기까지 하다.



고대 유적지에 수직으로 서서 죽은, 그래서 의미가 소생하고 있는 칼럼들은 유산일 뿐 아니라 뭔가 새로운 시작의 동기가 된다. 이런 특별한 동기부여는 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가 심취했던 ‘폐허의 미학’과 ‘유적의 시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로마의 유적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하자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말이 함의하는 것은 과거의 유산에서 “적어도 어떤 비범한 개념을 획득하는” 것이며, “자신을 속속들이 개조하려는 재생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느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새로 시작한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신문 용어로서 칼럼이라는 말에 담긴 역사적 흔적을 살펴보았다. 디지털 미디어가 대세인 오늘날 칼럼과 칼럼니스트라는 용어는 훨씬 폭넓게 쓰인다. 무엇보다도 온라인 매체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글의 소재와 주제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글의 형식과 내용에서 모두 열려 있다. 일단 원주의 이미지를 지닌 형식이 없다. 지금은 세로 가로 관계없이 일정 크기의 외곽선으로 정형화한 난에 실린 글이라면 칼럼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사전에서 정의하는 전통적 의미의 칼럼, 곧 “신문, 잡지 등에서 시사, 사회, 풍속 따위에 관해 짧게 평하는 정기적 기고”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문 칼럼’은 그 고유의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종이 신문은 현대사에서 수백년 동안 주류 매체였지만, 디지털 문명의 도래와 함께 지난 30년 동안 소멸의 위협을 받아왔다. 그렇다고 이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영원한 것 없는 문명사적 운명일 뿐이다. 의지대로 되지 않는 운명임을 깨닫는 비극적 품위를 잃지 않으면 된다. 신문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책도 디지털 사회의 등장과 함께 종언의 경종을 계속 들어왔다. 종이에 인쇄되는 문자 매체인 책과 신문의 운명은, 과거 역사는 각기 다르지만, 미래에는 같은 길을 갈 것 같다.



책과 신문이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죽어가고 있을 뿐이기에. 곧 살아 있다. 사람들은 문명사적 변화의 초기에는 그 효과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모든 변화에 수반하는 과도기의 의미와 그 활용에 대해서는 무심할 때가 많다. 과도기가 의외로 길 수 있다는 것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과도기가 어느 정도일지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미래학자는 많지 않으리라. 어쨌든 그 시기는 언젠가 이별하게 될 책과 신문이 남기고 갈 보석 같은 말을 직접 들을 마지막 기회다. 어떤 존재든 소실의 순간이 가까워지면 들어둘 만한 소리를 많이 전하는 법이다.



신문은 보도 기사처럼 소식을 전하기도 하지만, 책의 글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글 또한 싣는다. 칼럼이 바로 그것이다. 칼럼은 다양성의 보고다. 생물 다양성처럼 문화 다양성도 문화 환경에 필수적인데, 신문은 칼럼의 소재와 주제뿐만 아니라 필자의 다양성을 통해 자기 스스로의 다양성 또한 성숙시켜왔다. 그러면서 뉴스의 대중 전달이라는 ‘넓이의 역할’에 독자의 사유와 감성을 자극하는 칼럼이 지닌 ‘깊이의 역할’을 더해왔다. 짧지만 함축적이며 의미의 밀집도가 높아 돌기둥처럼 단단해진 칼럼은 세월의 풍화를 덜 겪고 오래 남을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피에트로 벰보는 “작가는 오로지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니 작가 자신의 사후에 태어나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는 모험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 시대에 신문 칼럼을 쓰는 사람들은 이런 고전적 의미의 작가여야 할지 모른다.



오늘날 뉴 미디어의 입장에서 신문을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라고 부르면서 이미 낡은 과거의 유산이라고 규정한다. 나는 레거시 미디어를 오히려 ‘미래의 유산’을 남길 매체라는 뜻으로 새긴다. 문명사적 과도기에 스스로 소실을 인정하는 비극적 품위를 잃지 않고 성실히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이 흘러 미래 세대는 문자문화의 유적지에 수직으로 서서 죽은, 그래서 의미가 소생하는 칼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도 신문 칼럼니스트들은 미래 유적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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