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란티어 CEO 앨릭스 카프
9·11 테러·중국 위협에 새 신념
“지적·도덕적 엘리트가 권력을”
우린 그런 꿈 가진 기업가 있나
9·11 테러·중국 위협에 새 신념
“지적·도덕적 엘리트가 권력을”
우린 그런 꿈 가진 기업가 있나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의 CEO가 지난 4월 워싱턴 DC 미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힐 앤 밸리 포럼에서 '힘, 목적, 새로운 미국의 세기'라는 주제로 패널 연설을 하고 있다. 힐 앤 밸리 포럼은 의원, 기술 기업 CEO, 벤처 캐피털리스트가 모여 기술과 국가 안보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게티이미지/AFP 연합뉴스 |
미국 주식시장에 큰 관심 없는 사람도 ‘팔란티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테슬라·엔비디아와 함께 요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AI 빅데이터 기업. 2024년이 시작할 때 팔란티어 주가는 16.58달러였다. 지난 주말 종가는 137.3달러. 시가총액은 약 3240억달러(약 445조원)로 미국 30위권 빅테크로 급성장했다. 1억을 투자했다면 1년 6개월도 안 돼 8억이 된 셈이니 사람들이 흥분할 수밖에. 하지만 그 이상으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설계자 격인 피터 틸과 팔란티어를 공동 창업했고 현재 CEO인 앨릭스 카프(58)다.
컴퓨터 괴짜나 매끈한 MBA 즐비한 실리콘밸리에서 이 곱슬머리 CEO의 이력은 낯설다. 스탠퍼드 로스쿨을 다녔지만 로펌에 진절머리 내며 철학으로 진로를 바꿨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하버마스에게 배우며 박사 학위를 땄다. 맞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하버마스. 신마르크스주의와 비판철학의 거장 말이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자조적 유머까지 등장한 대한민국과 달리, 그는 문학·철학이 기업과 국가 발전의 뿌리임을 매혹적인 문장으로 설득해 왔다. 우선 기업 이름. ‘팔란티어’는 영미권 판타지 문학의 바이블 격인 ‘반지의 제왕’에서 가져왔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수정 구슬의 이름. 여담이지만, 팔란티어 출신들이 세운 AI 방산 기업 ‘안두릴’ 역시 그 소설에서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검의 이름이다. 미국 국가 안보에서 안두릴이 창이라면, 팔란티어는 방패인 셈이다. “시공을 뛰어넘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모든 것을 통찰하겠다”는 야심의 새 방패다.
앞서 언급한 놀라운 성장을 기록하고 주주들에게 보낸 25년 1분기 편지에서, 카프는 다시 고전 철학과 현대 문학을 인용한다.
하나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또 하나는 “귀족은 그렇게 태어났다는 걸 제외하면 자신이 가진 권력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의 엘리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지적, 도덕적 우월함이 있다.”(프랑스 현대 소설가 미셸 우엘베크)
이 두 문장에 카프의 세계관과 정체성이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비판철학을 전공했던 좌파 철학자는 9·11 테러와 중국의 위협을 체감하며 기업은 미국의 안보에 우선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로 거듭났고, 이제는 지적·도덕적 엘리트가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않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시총이 폭등했지만, 팔란티어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겠다는 기업이 아니다. 상반기인 2월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자신의 책 ‘기술 공화국’에서 카프는 말한다. 실리콘밸리는 지금 탐욕의 중심이다, 미국의 안보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개인의 욕망과 사적 이익에 혈안이다, 중국의 위협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 국가 안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팔란티어의 핵심 임무는 서양 특히 미국을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카프처럼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런 신념과 철학을 지닌 기업가·창업가를 찾을 수 있나. 시대에 따라 요구되는 영웅은 변하는 법. 이제는 이념과 진영을 넘어 문명 충돌의 시대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우리만의 지적·도덕적 엘리트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수웅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