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서울가정법원 건물에 붙어있는 대한민국법원 상징 로고. /뉴스1 |
유해 화학물질을 다루는 반도체 공장에서 11년간 일한 뒤 질병으로 사망한 근로자에 대해, 화학물질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1심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최수진)는 A씨 배우자가 “유족 급여를 지급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지난 4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23일 밝혔다.
2004~2016년 국내 한 반도체 공장에서 여러 화학물질을 사용해 반도체 웨이퍼를 연마·세정하는 업무를 했던 A씨는 2017년 44세 나이로 백혈병의 전조 단계 중 하나인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진단을 받고 이듬해 숨졌다.
A씨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 급여를 청구했으나 공단은 “화학물질과 질병의 관련성에 대한 의학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역학조사 결과 “작업 환경에서 디클로로메탄 등 유해 물질이 검출됐지만, 백혈병 자체에 대한 연구가 대규모로 이뤄지지 않아 이 같은 물질과 질병 사이 연관성을 규명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에 유족이 소송을 냈고, 1심에서 승소했다. 재판부는 “작업 환경상 유해 요소들이 질병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자료가 부족한 것을 두고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해석해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A씨가 주 6일 교대 근무를 하며 매주 평균 60시간 일했다는 점을 들어 “누적된 장시간 근무로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여러 유해 인자에 노출된 것이 발병과 악화에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많은 종류의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에서, 덴탈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 외 다른 적절한 보호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역학조사에서 측정된 유해인자 노출값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장기간 노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공단 측이 이 판결에 항소하면서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 재판이 열리게 됐다.
[김은경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