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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2030] ‘광장’에 모인 키보드 워리어

조선일보 이영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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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2030] ‘광장’에 모인 키보드 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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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분노에 찬 사람들이 광장으로 향했다. “드라마 보다가 화 나서 왔어요.” 상기된 얼굴로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는 이들이 하루 새 100여 명으로 늘었다. 현실이 아닌, 웹툰 ‘광장’의 댓글창. 이곳은 지난 6일 넷플릭스에서 동명의 드라마가 공개된 이후 웹툰 팬들의 ‘방구석 시위’ 현장이 되고 있다. 글로벌에선 ‘톱10 시리즈(비영어) 부문 1위’를 차지했지만, 국내 반응은 반대인 상황. 드라마가 건달 세계에서 최고를 찍고 은퇴한 주인공이 동생의 복수를 한다는 뼈대만 남겼고, 원작 설정을 상당수 없앴다는 점에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원작처럼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폭력성을 짚지 못하고 액션 위주의 영상에 그쳤다는 것이다.

웹툰 애독자로서 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 다만 근본적으론 ‘K콘텐츠 성공 공식’으로 꼽히던 웹툰의 영상화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켜고 최근 나온 영상 작품들을 한번 살펴보라. 한두 다리 건너면 웹툰이 원작이다. 올해 개봉했거나 예정인 것만 10편이 넘는다. 2010년대 시작된 이 흐름은 2020년 전후 ‘K웹툰’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지금의 궤도에 올라섰다. 초창기엔 웹툰이란 틀에 갇혀 빛을 보지 못했던 스토리가 영상 덕분에 대중화되며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비슷한 스토리의 웹툰들이 영상으로 쏟아지면서, 검증된 웹툰의 인기에 영상이 편승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소설의 영상화가 빈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라면, 웹툰의 영상화는 이미 완성된 그림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이다. 작품 구성에서 웹툰은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활자 매체에 비해 적다. 이미 강렬한 인상을 남긴 주인공의 생김새와 성격을 바꿨다가는 원작 팬들로부터 화를 입기 십상. 원작의 설정을 품는 동시에 영상 언어로 나름의 메시지를 또 담아내는 게 작품의 성패에 중요하다. 결코 쉽지 않은 일. 그럼에도 영상 경쟁 환경이 치열해지면서 일정 수준의 ‘티켓 파워’를 지닌 웹툰에 대한 주목도가 업계에서 높아지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학창 시절 즐겁게 보던 웹툰은 몰래 보던 것들이었다. 기발한 상상력과 스토리를 송곳처럼 품고 있어 어딘가 내보이기 민망한 웹툰. 매일 밤 11시 잠들기 직전 그 웹툰의 다음 화가 뜨기를 기다리는 것이 낙이었다. 최근 그와 같은 경험은 현저히 줄었다. “웹툰의 영상화가 작가들 사이에서 작품성에 대한 자격증처럼 여겨진다”는 한 작가의 말처럼, 많은 작가가 작품의 영상화와 대중성을 중시하게 된 결과일 테다. 2020년 초반 50%를 넘었던 국내 웹툰 시장의 성장세도 최근 20% 수준까지 낮아진 상황, 소위 ‘잘 팔리는’ 웹툰에 대한 선호 추세는 앞으로도 줄어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달 초 광장으로 향했던 수백 명의 분노 뒤엔 이런 변화에 대한 허탈감이 자리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키보드 워리어’(댓글로 언쟁하는 사람)의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몰래 보고 싶은 웹툰이 사라진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뼈 아픈 지적이다.

[이영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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