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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뒤늦게 허리띠 조이는 유엔

조선일보 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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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뒤늦게 허리띠 조이는 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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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살인적인 수준인 뉴욕에서 유엔 본부 1층에 있는 ‘로비 카페’는 만만한 곳이다. 이틀에 한 번꼴로 작은 사이즈 커피를 마시는데 2.15달러(약 3000원)였다. 그런데 최근 2.8달러로 무려 30% 정도 올랐다. 커피 원두가 좋은 것으로 바뀐 것도 아니다. 빵, 샐러드 등 외부 가게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제품 가격도 모두 최소 5% 이상씩 뛰었다. 카페 메뉴판만 바뀐 게 아니다. 지난달 19일부터 건물 내 라운지 일부분을 매일 오후 5시부터 닫고 있다. 지난 3월엔 건물 출입구 중 하나를 며칠 동안 닫기도 했다.

이런 변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경비 절감’이다. 유엔은 카페 메뉴 가격을 올리며 “카페에 지급하는 보조금 지급을 줄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라운지 운영 시간을 줄여 운영비를 아끼고, 한 출입구에 근무하는 보안 요원 약 3명에게 들어가는 임금도 줄여보겠다고 했다. 올해 유엔 정규 예산은 37억2000만달러(약 5조1000억원)다. 정규 예산은 회원국이 분담하는데 미국(22%), 중국(20%) 비율이 매우 높다. 그런데 분담금을 언제까지 내야 한다는 명시적 규정이 없다 보니 각국은 차일피일 납부를 미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뒤 미국은 정부 재정 적자를 줄이려고 해외 원조부터 깎아가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유엔은 불안하기만 하다.

현재 상황은 유엔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산하 기관을 렌트비가 높은 맨해튼 등 대도시에 자리 잡게 했고, ‘글로벌 철밥통’ 직원들은 출근 대신 ‘재택근무’ 또는 ‘혼합형 근무’를 택하며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 매년 돌아오는 재정 문제를 그때그때 회원국들의 호의로 해결하면서 스스로 자립하는 능력도 잃어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지난 3월부터 요란하게 비상벨을 울리며 비상 경영에 나섰다. 그는 부서를 통합해 방대한 조직을 슬림화하겠다고 한다. 뉴욕에 있는 산하 기관 건물 계약이 종료되면 케냐 등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낮은 지역으로 사무실을 옮기겠다고도 했다.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그는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여유가 없다”고 토로했다.

유엔은 6·25전쟁에 유엔군을 파병해 한국을 도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에 맞서 피 흘려 싸운 고마운 존재다. 그래서 유엔이 처한 상황이 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변화를 요구해 온 회원국들의 요청을 귀담아듣지 않고 방만한 운영을 한 결과를 쉽게 고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20여 년간 유엔을 취재한 미국 기자는 “한때 유엔 도서관에 없는 책이 없었다”고 했다. 옛 책을 보관하며 새로운 책을 들여놓는 활력 넘치고 알찬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곰팡내 풀풀 나는 책들이 가득해 찾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 유엔이 그간 쌓인 먼지를 모두 털어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기관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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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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