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호수와 고성(古城)을 품은 현지인들의 휴양지
클라겐푸르트 구시가의 중심인 노이어(Neuer) 광장에 있는 '린드부름(Lindwurm) 분수'와 헤라클레스 조각상 [사진/권혁창 기자] |
(그라츠·클라겐푸르트[오스트리아]=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오스트리아를 여행할 때 빈(Wien)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위용을 실감했다면, 이번엔 남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잘츠부르크와 인스브루크가 있는 서쪽도 매력적이지만, 오스트리아 남부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제2의 도시 그라츠(Graz)와 현지인들의 휴양지로 사랑받는 클라겐푸르트(Klagenfurt)는 매혹적인 구시가지, 중세의 이야기를 간직한 고성(古城), 광활하고 신비로운 자연경관으로 호기심 많은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남부는 역사적으로 슬라브족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곳곳에서 슬라브 색채를 엿볼 수 있다.
클라겐푸르트 란트하우스의 야경. 16세기에 건축된 케른텐 주(州)의 옛 청사 건물로 현재는 주의회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
클라겐푸르트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냉랭하고 습한 공기. 비는 그냥 맞아도 될 만한 가랑비였지만, 저녁 무렵 차가워진 바람에 제법 두툼한 외투를 껴입었다.
우선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식당을 찾아 구도심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도시의 야경은 비가 올 때 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다. 석조 건축물이 많은 유럽이어서 그런가. 물기를 머금은 돌은 윤기를 담은 또 다른 빛을 만든다.
빗물에 젖은 돌이 가스등 불빛을 반사해 뿜어내는 은은하고 촉촉한 빛. 낯선 도시 클라겐푸르트의 첫인상이다.
클라겐푸르트 구시가지의 야경 [사진/권혁창 기자] |
◇ 클라겐푸르트의 두 상징물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나와 미리 구글맵에 찍어둔 관광 포인트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뵈르터제만들'(Wörtherseemandl)이라는 청동상이다.
클라겐푸르트의 상징물 중 하나라는 말에 크기를 상상해봤지만, 모퉁이를 돌아 동상을 본 순간,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을 연상케 하는 반전에 당황스러웠다.
오른손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는 이 귀여운 난쟁이의 왼손 아래엔 술통이 기울어져 있고, 그 안에서는 술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다. 동상이자 분수인 셈이다.
전설이 없을 리 없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미사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무시하자 난쟁이가 연회장에 나타나 경고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자 그는 술통의 마개를 열었고, 곧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와 도시 전체가 잠겼다. 그 물줄기가 오늘날의 뵈르터 호수가 됐다는 이야기다.
'뵈르터제만들'(Wörtherseemandl) 청동상 [사진/권혁창 기자] |
슬라브 신화의 물의 정령과 유사한 모티프여서 슬라브 영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내막을 알고 나니 신의 경고를 상징하는 동상이 결코 귀여워 보이지 않는다.
클라겐푸르트에는 랜드마크라 할 만한 흥미롭고도 기념비적인 석조 동상이 있다. 구시가의 중심인 노이어(Neuer) 광장에 있는 '린드부름(Lindwurm) 분수'다.
용(龍)과 유사한 전설의 괴물인 린드부름은 습지에 살며 가축과 처녀를 잡아먹었는데 이 괴물을 처치하면서 도시가 생겨났다고 한다.
1583년에 제작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590년에 완성됐다.
6t이나 되는 이 조각상은 1593년 젊은이 300명이 이 광장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43년 뒤 괴물 앞에는 이에 맞서는 헤라클레스 조각상이 세워져 이야기를 완성했다.
13세기 케른텐주 공작을 지낸 베른하르트 폰 슈판하임의 동상과 분수 [사진/권혁창 기자] |
◇ 문장(紋章)이 숲을 이루다
1594년 건설된 고풍스러운 케른텐 주(州) 옛 청사 건물은 클라겐푸르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건물 안에 있는 '바펜잘 임 란트하우스'(Wappensaal im Landhaus)라는 장소엔 당시 이 지역 귀족 가문, 주지사, 고위 관리 등의 상징적 표지인 문장(紋章) 656개가 사방의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높이 9.8m의 대형 홀에 들어서는 순간,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벽에 장식된 문장들이 한가득 숲을 이룬 화려한 광경에 아찔해진다.
유럽의 한 작은 도시 귀족 가문의 문장이 도대체 나와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만, 단 한 개도 똑같은 도안이 없는 그 수많은 문장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하나씩 알아보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구를 억제하며 방을 나와야 했다.
클라겐푸르트 란트하우스 안에 있는 '바펜잘 임 란트하우스'(Wappensaal im Landhaus). 문장(紋章) 656개가 벽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
짐짓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한국에서의 습관을 잠시 접고 에스프레소에 크림을 올린 브라우너(Brauner)를 시켰다.
그런데 마음은 조급하다. 작은 도시지만, 둘러볼 곳이 너무 많았다.
9개 연방주 중 케른텐 주의 주도(州都)인 클라겐푸르트는 인구 10만이 조금 넘는 곳이지만,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보행자 구역이 있고, 그 작은 구역 안에 대성당, 현대미술관, 캐른텐 박물관, 1868년에 설립된 서점 등 볼거리가 많다.
무엇보다 클라겐푸르트를 휴양지로 만든 뵈르터 호수는 꼭 보고 싶었다. 서둘러 구시가를 둘러본 뒤 호수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피라미덴코겔(Pyramidenkogel) 전망대로 향했다.
100m 높이의 목주구조물인 피라미덴코겔(Pyramidenkogel) 전망대 [사진/권혁창 기자] |
전날 시작된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한다. 낮게 깔린 잿빛 구름에 자욱이 시야를 방해하는 안개까지. 전망대에서 전망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차로 20분쯤 걸려 도착했다. 특이하게도 전망대는 나무로 만들었다. 총 높이 100m로 목조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해발 고도는 851m.
리프트를 타고 올라 호수와 산, 그 사이로 오밀조밀 들어선 마을들을 360도 파노라마로 감상한다.
다행히 시야가 그다지 나쁘진 않다. 다만 아쉬운 건 호수의 색깔이다. 해가 있었다면 아름다운 코발트색이었을 뵈르터 호수는 마치 폭풍전야의 스코틀랜드 네스호 같은 분위기였다.
피라미덴코겔 전망대에서 바라본 뵈르터 호수 [사진/권혁창 기자] |
◇ 시간을 거스르는 마을과 성(城)
중세로 시간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
클라겐푸르트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작은 중세 도시 '마리아 잘'(Maria Saal)과 그곳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13㎞ 가면 나오는 '호흐오스터비츠 성'(Burg Hochosterwitz)이다.
고딕양식의 빛바랜 성당 첨탑과 수백 년 풍상을 견뎌낸 석벽, 기울어진 암갈색 지붕, 검게 그을린 이끼 낀 담장, 구불구불 이어진 돌길… 마리아 잘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를 잊는다.
15세기에 지어진 대성당은 외관은 고딕양식이지만, 내부는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됐다.
마리아 잘(Maria Saal) 대성당 [사진/권혁창 기자] |
성당 밖의 벽에는 '우편마차'(Reisewagen)라고 불리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부조 작품이 있는데, 이름처럼 중세 시대 우편 운송 장면으로, 당시 마리아 잘의 위상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통설과, 죽은 이의 영혼을 사후 세계로 데려가는 상징으로 조각된 것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건 성당 안에 있는 프레스코화다. 클라겐푸르트 출신의 화가 헤르베르트 뵈클(1894∼1966)의 1928년 작품 '갈릴리 바다에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하는 예수'라는 제목의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다. 레닌의 얼굴이다.
작가의 구체적인 설명이나 기록이 없는 가운데 그림은 논란 속에 공개되지 않다가 1982년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헤르베르트 뵈클(1894∼1966)의 1928년 작품 '갈릴리 바다에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하는 예수' [사진/권혁창 기자] |
호흐오스터비치 성은 로마 시대 요새로부터 시작해 9세기에 성곽의 면모를 갖췄고 16세기 후반까지 오랜 세월 증축을 거쳐 난공불락의 요새가 됐다.
해발 664m의 돌산 위에 우뚝 솟아 멀리서도 단번에 그 위세를 느낄 수 있다.
20분쯤 걸어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데, 올라가면서 14개의 철문을 통과하는 재미가 있다. 걷는 게 힘든 사람은 전용 엘리베이터(푸니쿨라)를 탈 수도 있다.
현재 성은 중세 시대의 무기와 갑옷, 그림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인데, 성에서 내려다보는 케른텐 평야의 풍광이 일품이다.
성은 늘 상상하게 한다. 공격하는 쪽이든 방어하는 쪽이든 전투 상황에 처한 '불쌍한 중세 병사'를 떠올려본다.
호흐오스터비츠 성(Burg Hochosterwitz) 전경 [오스트리아관광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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