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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동해의 19호실

조선일보 유미·‘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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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동해의 19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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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에는 한 호텔의 19호실이 등장한다. 이곳은 주부로 살아온 여성이 ‘자기만의 방’으로 마련한 공간이다. 그는 이곳에 와서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될 뿐이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19호실이다. 내게도 바로 이 19호실이 있었다.

결혼한 지 막 4개월 되었을 무렵이다. 한창 신혼이었지만,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게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친한 언니와 통화하다가 말했다. “아무 때나 훌쩍 떠날 곳이 있다면 좋겠다.”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만들면 되지. 같이 해볼래?” 이렇게 해서, 결혼한 지 각각 3개월, 4개월 된 새색시들은 다소 발칙한 일을 저질렀다. 바로 강원도 동해시에 둘만의 집을 얻은 것이다. 중고 세탁기와 냉장고, 선풍기, 안락의자, 침대 매트, 재밌는 소설들을 집에 꽉꽉 채워 넣었다. 우리는 이곳의 이름을 ‘우모세’로 정했다. ‘우리 모두의 세컨하우스’의 줄인 말이다.

우모세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12층 창밖으로 푸른 산이 보였고, 드넓은 밭을 가로지르는 철길엔 기차가 달렸다. 봄이면 천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고, 붐비는 강릉 해변과 달리 동해 해변은 한산해 우리만의 천국 같았다. 푸른 묵호항이 한눈에 보이는 논골담길은 좁은 골목을 탐방하는 재미가 있었다. 무릉계곡은 한여름 시원한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늦은 오후에 산책하다가 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서호책방에 들러 책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가끔 온전히 혼자이고 싶을 때, 우모세는 우리의 믿음직한 19호실이 되어 주었다. 언제든 합법적인 일탈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마치 친정집 같은 ‘믿을 구석’이랄까? 우모세에서 나는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나는 일상과 안전한 일탈을 오고 가며 새로운 가정과 온전한 나를 동시에 지키는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현재 우모세는 운영 중단 상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동해의 조용하고 여유로운 길과 푸른 바다가 떠오른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우모세의 2년은 서툰 새댁들에게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었다. 언젠가 우모세 시즌2로 돌아와, 더 많은 사람의 안락한 도피처를 만들어 줄 수 있기를.

[유미·‘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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