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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시평]제국의 자살

머니투데이 이수현변호사(이수현법률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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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시평]제국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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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이수현법률사무소 대표

이수현 이수현법률사무소 대표



최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기습적으로 영상을 틀면서 그 영상이 남아공에서 학살당한 백인 농부들의 모습이라 주장하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영상은 남아공이 아닌 콩고에서 촬영된 것임이 밝혀졌으나 백악관은 해당 영상이 "아프리카에서 백인 농부들에 대한 박해를 상징한다"는 취지의 엉뚱한 답변을 내놨다.

트럼프 2기 취임 후 미국은 중남미 출신 불법 이민자를 대거 추방했다. 또한 미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극도로 제한함에도 트럼프는 오로지 한 국가를 지정해 이 나라로부터 정치적 망명의 문호를 열었는데 그게 바로 남아공이다. 트럼프는 남아공에서 부당한 인종차별을 당한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로 남아공에 거주하는 백인)들의 미국 망명의 문을 열겠다는 것이다. 이 조치에 다수의 아프리카너는 문화적 정체성 유지를 위해 미국 망명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나 상당수는 이 조치를 환영하며 기대감에 들떠 있다.

이쯤 되면 트럼프는 미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 백인의 대통령임을 자처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인'이라는 용어는 일상용어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법률용어가 될 수는 없다. 정의규정을 두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후 남부에서는 '백인'(White) 또는 '유색'(Colored)의 정의규정을 법률에 뒀고 이에 따라 두 부류의 시민생활은 철저히 분리됐다. 소위 '분리됐지만 평등하다면 합헌'(Separate but Equal)이라는 도그마가 남부를 휩쓸던 시절의 이야기다. '유색'의 정의는 4대조에 해당하는 16명의 남녀 조상 중 한 명이라도 '유색'이면 '유색'이라는 것이다. 16명 중 단 한 명의 흑인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흑인이며 신분증에는 '유색'이라고 찍힌다. 이 신분증을 가진 백인 외모의 자가 용감하게 백인 전용 기차칸에 탔다가 뺨을 맞고 쫓겨나면서 흑인민권운동의 역사가 시작됐다. 트럼프가문 자체가 다른 미국 가정과 마찬가지로 독일, 동유럽 등의 잡다한 혈통이 섞였는데 자신은 순수 백인의 화체인 것처럼 행동한다. 순수 백인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은 이 야만의 시대를 뚫고 인종이나 피부색에 무관심한(color-blind)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냈다. 2차대전은 진영의 전쟁이자 이념의 전쟁이었다. 즉, 아리안 순수혈통주의를 주장하는 나치즘과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전쟁이었다. 미국의 흑백을 비롯한 각종 색깔의 시민들은 성조기 깃발 아래 어깨를 걸고 나치와 일제의 군대를 무찔렀다. 이기고 돌아온 군인들은 전후 미국에 통합의 새 기운을 불어넣었고 이는 그대로 재키 로빈슨,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역사로 이어졌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은 시민의 성별, 나이, 종교, 사상, 성적 지향, 인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흐름을 선도한 것이 미국이었는데 트럼프의 최근 행보는 최근 100여년의 세계사적 진보를 거스르는 충격적인 퇴행이다. 가히 제국의 자살이라 할 만하다.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빠진 빈 자리를 무엇이 메울까.

이수현 변호사(이수현법률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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