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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스스로 생성”…동학, 한국 현대 철학의 뿌리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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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스스로 생성”…동학, 한국 현대 철학의 뿌리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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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천도교의 1세 교조 최제우, 2세 교조 최시형, 3세 교조 손병희, 4세 대도주 박인호,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 천도교중앙총부 제공

왼쪽부터 천도교의 1세 교조 최제우, 2세 교조 최시형, 3세 교조 손병희, 4세 대도주 박인호,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 천도교중앙총부 제공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이제 여기에서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형성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르는 현재의 철학이 어떤 문제들을 붙들고 씨름해왔는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철학사적 지점이 어느 곳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철학에서 ‘현대’라는 분기점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이 연재에서는 철학서를 한문이 아닌 한국어로 쓰기 시작한 시점, 철학함의 지평―한 철학적 사유가 전제하고 있는 세계―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지평에 근접한 시점, 그리고 철학서들을 참조하는 하한선이 당대의 세계 철학―실질적으로는 서구 철학―으로까지 확대된 시점으로 잡았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현대 한국 철학의 본격적인 형태는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이르러 한글로 쓰인 철학적 글들이 등장했고, 철학을 다룬 잡지들도 발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논의가 당대의 세계를 의미론적 지평으로 놓고서 전개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이다. 따라서 논의는 1920년대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만, 일단 19세기 중엽에서 시작한다. 최초의 본격적인 철학서라 할 ‘신인철학’(1930, 이돈화 지음)의 동학사상을 논하려면, 그 근간이 되는 수운 최제우에게까지 가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본격 철학서 ‘신인철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현대 한국 본격 철학서 ‘신인철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노쇠한 왕조의 기운이 쇠잔하고 서쪽에서 몰려오던 먹구름이 그예 비바람을 뿌리기 시작했을 때,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한 사내가 마침내 맑은 빛과 만난다. 사내는 이 만남에서 얻은 깨달음을 조선 땅 곳곳에 뿌리고, 힘겨운 나날을 버티며 살던 민중은 그가 뿌린 맑은 빛을 만나 깨어난다. 그러나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권력자들은 이 새로운 흐름을 파탄 내기 위해 광분하고, 끝내 사내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은 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다.



‘동학’이라는 말에는 이런 극적인 탄생 설화가 내뿜는 아우라가 깃들어 있다. 구한말의 유교적 환경에서 태어나 살아가던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는 당대 현실이 던지는 여러 착잡한 문제를 가슴에 안고 방황하는 삶을 살았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수백년을 버텨온 조선 왕조는 내부에서 그 기운이 쇠하여갔고, 바깥으로부터는 낯설고 의심스러운 서세(서양 세력)의 사나운 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들어온 ‘서학’은 민중의 구원을 설파하는 듯 보였으나, 그것의 뒤에는 위협적인 제국주의의 흉계가 번득이고 있었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우리나라) 운수 가련하다. (…)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그는 이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현실에 대처해나갈 수 있는 사상을 꿈꾸었으나 길이 보이지 않았다.



긴 상실과 방황의 시간 끝에 고향 경주의 용담으로 돌아온 수운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각고의 노력으로 구도를 이어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한 인간의 진실한 갈망에 마침내 득도의 시간이 열렸다. 경신년(1860) 어느 날 수운은 신비 체험 끝에 상제(한울님)를 만나 영부(靈符)를 얻게 된다. 영부란, 수운이 영감으로 한울님에게서 받은, 천신을 그림으로 나타낸 표상을 말한다. 영부는 ‘심벌’(상징)이다. 심벌은 약속의 징표이다. 두 조각으로 깨져 흩어진 거울이 훗날 다시 맞추어져 그것이 하나임을 증명할 때, 그 거울을 징표로 맺어진 약속은 확인된다. “네가 바로 내 아들이로구나!” 그 순간은 이 땅에 동학이 탄생하는 ‘아이온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다. 수운은 그 깨달음의 날, 상제와의 약속을 얻게 되고 그 약속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찾기에 이른다.



수운이 상제와 맺은 언약은 무엇이었던가? 그 첫째는 세상의 질병을 없애 민중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요, 그 둘은 민중을 가르쳐 상제의 뜻에 따르는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다시 개벽’을 여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 학문은 어떤 학문인가? 수운은 그것을 ‘동학’(東學)이라 이름 지었다. 수운은 당시 세상을 위태롭게 하는 서양 열강의 쇄도와 그에 편승해 퍼져가던 서학(西學)에 대한 분명한 저항 의식을 천명한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동학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언약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동경대전’에 수록된 ‘논학문’은 수운에게 배움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그가 전했던 최초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선생께서 받은 도는 무엇이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수운은 “천도(天道)라 합니다”라고 답했다. 수운의 이런 대답은 사람들의 의혹을 증폭시켰다. 당시에 퍼지고 있던 천주교 또한 ‘천도’(하늘의 뜻)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수운이 말한 천도가 양도(서양의 도) 즉 천주교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운이 자신의 도를 동학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렇다면 수운은 동학의 도와 서학(양학)의 도의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보았는가? 수운은 무엇보다도 우선 서학도 상제(Deus·신)를 모시기는 하나 거기에는 진실됨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서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서학의 이야기들은 조리가 없고, 그들의 경서(經書·성경)는 기이한 언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천주(상제, 하느님)를 모시고자 하는 진심이 없고, 다만 천주께 복을 빌 뿐입니다. 몸가짐에는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없고, 배움에는 ‘천주지교’(天主之敎)가 없습니다. 천주를 모시는 듯하지만 구체적인 정성이 보이지 않고, 천주에 대해 말하지만 진실된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여 그들의 도는 헛된 것이고 그 가르침은 천주의 학문이 아닙니다.” 수운이 볼 때 천주교의 성경은 허황된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신도들은 진실된 신앙이 아니라 기복 신앙에 빠져 있었다. 다른 한편 그는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 하고 사람됨의 도리에 따르면서 동학의 가르침을 받으면, 내면의 변화가 자연스러운 가운데 바깥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하면서 동학에 따를 것을 역설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한겨레 자료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한겨레 자료

다른 한편 그는 좀 더 이론적인 차이를 제시했고, 이 차이를 “그 도(道)는 같으나 리(理)는 다르다”고 표현했다. 이는 곧 서학도 동학도 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점에서 같지만, 전자의 이치와 후자의 이치는 다르다는 것이다. 양자는 상제/하느님을 모시는 같은 길을 걷는 행위이지만, 양자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근거는 다르다. 그렇다면 그 핵심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수운은 서학과 동학의 차이를 ‘무위이화’(無爲而化)에서 찾았다.



무위이화는 서학에서 나타나는 신의 작위성에 대비되는, 도가철학적인 존재론을 의미한다.(한국 철학사에서 도가철학은 불교철학이나 유교철학만큼 성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되지만, 사실 근대 이래의 민중사상 및 민족사상의 기저에는 대개 도가철학이 깔려 있다.) 이는 곧 서학의 상제가 세상사에 일일이 간섭하는(“하느님의 역사(役事·일)하심”) 데에 비해, 동학의 상제는 그러한 간섭을 하지 않으며 세계는 그러한 ‘작위 없이’(無爲) 자체의 이치에 따라 생성해간다는(化) 것을 뜻한다.



무위이화는 수운이 우주의 실체를 ‘지기’(至氣)로 본 것과 관련된다. 지기는 “형이상의 정신성으로서 천지에 가득 차 있으니, 그에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고 그에 따르지 않는 것도 없는” 근본 실체이다. 이 지기의 활동이 곧 ‘무위이화’인 것이다. 동학은 인격신의 작위가 아니라 이 지기의 무위이화를 따르는 학이다. 이 점은 서학과 동학의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훗날 야뢰 이돈화는 동학의 이런 이치를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의 철학을 동원해 현대적으로 설명한다. 스피노자에 입각할 때 세계는 어디까지나 내재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신은 곧 자연’), 베르그송에 입각할 때 창조는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 자체 내에서 일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해석에서 동학은 어떤 분열을 겪게 되는데, 수운의 종교 체험과 야뢰의 철학적 설명 사이에는 일정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수운 역시 서학의 초월신을 비판했지만, 그가 종교 체험을 통해 만난 상제는 어디까지나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초월성과 내재성, 인격성과 탈인격성 사이의 이런 긴장이 동학에 내장되기에 이른다.)



동학의 실천철학은 ‘시천주’(侍天主)의 철학이다. 이 ‘시천주’ 개념 역시 이원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바깥의 신을 모시는 것일 수도 있고,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동학의 흐름 전반에 입각할 때, 특히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염두에 둘 때 이 개념은 저 바깥의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곧 천주임을 깨닫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동학은 인격신의 작위가 아니라 무위이화의 이치에 근거해 시천주를 행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수운의 사상과 실천은 해월(海月) 최시형(1827~1898)으로 이어진다. 해월은 자신과 세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수운을 스승으로서 받들었으며, 평생 관군에 쫓겨 다니는 와중에서 수운의 글을 책으로 편찬했다. 그는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시대를 물질 개벽이 이루어지는 선천개벽의 시대로 파악했으며, 이런 흐름의 극한에서 이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대가 열리리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고 했던 상제의 말씀을 이어, “사람이 하늘(한울)이고 하늘이 사람이니, 사람 바깥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바깥에 사람이 없다”는 ‘인내천’의 사상을 전개했다. 해월을 통해서 수운의 깨달음은 끊김 없이 이어지게 된다.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통, 근대, 탈근대’를 화두로 한 ‘세계철학사’를 집필했다.





철학자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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