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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가드너 여사의 미술관

조선일보 이현주 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경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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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가드너 여사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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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국 대학의 연구교수로 간 친구 덕분에 처음으로 보스턴에서 열흘을 머물렀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스턴 곳곳의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보냈다. 하버드대 안의 여러 박물관, 보스턴미술관, 시포트에 있는 현대박물관을 둘러봤다. 한국에서도 매일같이 일터인 박물관 문턱을 넘나들었는데, 여행지에 와서도 박물관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중에는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누군가는 보스턴미술관의 압도적인 컬렉션을 추천할지 모르겠지만,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뮤지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1903년 세상에 공개된 미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 미술품 수집가인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가 자신의 집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문을 연 곳이다. 보스턴 펜웨이 코트에 있는 이 미술관은 베네치아풍의 아름다운 건축양식 건물로 가드너 여사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방대한 예술품 컬렉션으로 가득 차 있다.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가드너 여사의 독특한 취향과 개성이 반영되어 있는 환상적인 공간이다. 회화·조각·가구·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품이 생전 그녀의 집에 있던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가드너는 1924년 84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 건물 4층에 살았는데 이곳을 개방하면서 자신의 소장품을 재배치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1층 한쪽 벽면에 자리한 존 싱어 사전트의 강렬한 대작 ‘엘 할레오’도 다시 마주하고 싶다. 미술관 안뜰 정원도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과 식물로 가득 채워진다. 빛이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1990년 미술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미술품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잃어버린 렘브란트, 드가, 마네 등의 걸작이 아직까지 행방불명이다. 작품이 사라진 공간조차 가드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작품을 걸지 않고 그대로 보존 중이다. 전시물뿐만 아니라 뮤지엄 전체가 그녀의 삶을 응집해 놓은 셈이다. 문득 이 세상 모든 박물관들도 단순히 전시물만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그곳을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응축되어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일하는 박물관도 그럴 것이다.

[이현주 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경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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