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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규 회장의 전화 한 통, 용산을 바꿨다”

헤럴드경제 홍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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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규 회장의 전화 한 통, 용산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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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 국회 본회의장 입장…곧 추경 시정연설
민경식 ㈜민경식건축연구소 소장 인터뷰
한국 건축 거장 故김수근 ‘공간’ 사무소 출신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무교동 SFC몰 설계
“공간의 ‘연결’ 중요…건축가 더 존중받아야”
민경식 ㈜민경식건축사무소 대표가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명동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가진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민경식 ㈜민경식건축사무소 대표가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명동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가진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민경식 ㈜민경식건축연구소 소장은 ‘시간과 공간이 연결되는 건축’을 추구한다. 건축물의 외형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이용자들이 고립되지 않고 서로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구조를 늘 고민하는 것이다. 이같은 민 소장의 철학을 알아본 이가 바로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다.

지난 2018년, 민 소장은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 HDC현대산업개발 임직원을 위한 사옥을 설계해달라는 정 회장의 부탁 전화를 받았다. 정 회장은 “국내에 디자인과 상업적 구성을 모두 고려해 복합쇼핑몰을 건축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며 용산 아이파크몰의 리모델링까지 전적으로 부탁해 왔다. 민 소장의 손길이 닿은 아이파크몰은 결국 온 시민들이 유모차를 끌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원같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헤럴드경제는 민 소장이 직접 디자인한 서울 명동의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그를 만났다.

민경식 소장이 리모델링·설계를 담당한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 모습  [㈜민경식건축연구소 제공]

민경식 소장이 리모델링·설계를 담당한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 모습 [㈜민경식건축연구소 제공]



-정 회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처음 용산 아이파크몰 설계 부탁 전화를 받고 고민하신 지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당시에는 용산 아이파크몰 일부가 전자상가로 쓰이고 있었거든요. 번듯한 강남 사옥을 놔두고 왜 그 허름한 곳으로 사옥을 옮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지금 생각하면 정 회장은 이제 용산의 시대가 열린다는 걸 간파했던 것 같아요. 선견지명을 가지고 당신이 몸소 아이파크몰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거죠. 정 회장과의 인연은 현대자동차 경영권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 넘어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버지 정세영 회장과 현대자동차를 떠나 처음 HDC현산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혼란이 생겼나 봐요. 제조업과는 다른 건설사업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건축가 10명을 불러 의견을 듣겠다며 좌담회를 열었죠. 그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어요. 알고 보니 정 회장은 제가 설계한 서울 중구 무교동의 파이낸스빌딩 쇼핑센터 SFC몰을 보고 연락을 한 거였어요. 제가 SFC몰에 담으려고 했던 건축적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용산 아이파크몰도 그렇게 만들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아이파크몰은 연간 35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드는 용산의 중심이 됐습니다. 용산 아이파크몰을 설계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무엇인가요?

▶먼저 사옥 프로젝트는 상가 건물의 약 6000평 면적을 사무실로 꾸며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용산 아이파크몰을 가보니, 건물은 큰데 층별 면적이 좁더라고요. 부서 간의 이동이나 업무 연결이 안 되고 소통이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임원실과 회의실 문을 모두 유리로 만든 거였어요. 그래서 서로가 하는 일이 노출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정 회장이 무척 좋아하더라고요(웃음). 그 외 사옥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는 정 회장이 도면을 함께 보며 의사결정을 해나갔어요. 설계자에게 그냥 맡기지 않고, 직접 건축 메커니즘을 공부한 정 회장이 대단한 거죠.


1차 사옥 설계 이후, 2차 용산 아이파크몰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갔어요. 저는 아이파크몰이 용산의 전체 도시적인 관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봤어요. 이 때문에 원래 있던 역사 위의 통로와 계단이 시민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어요. 큰 캐노피(천장이나 금속 덮개가 부착된 구조물)를 만들어 그 위에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게 했고요, 용산의 나머지 구역이 개발됐을 때 이동이 쉽도록 브리지(다리)도 재구성했죠.

-소장님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서울 중구 무교동의 SFC몰이 있는데요, 2001년 개장 당시 강북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쇼핑몰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SFC몰은 제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복합건물을 설계할 당시 만나게 된 싱가포르투자청의 친구가 부탁한 프로젝트였어요. 1990년대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북한 최고지도자를 만나며 외국 자본이 우리나라에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싱가포르투자청은 서울파이낸스센터 건물을 통해 임대수익을 내고 싶어 했어요. 전 이 프로젝트가 너무 재밌어 보였고요.


당시에는 광화문 직장인들이 식사하려면 호텔로 가거나 무교동 낙지골목에 가야 했어요. 한창 떠오르던 청담동의 트렌디한 레스토랑들을 강북으로 가져오고 싶었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게 SFC몰이에요. 또 광화문과 을지로의 직장인들이 꼭 식사하지 않더라도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태평로와 무교동이 통할 수 있게 구멍을 뚫어 연결한 이유죠.

2001년 공사 당시 촬영된 서울 중구 무교동에 있는 SFC몰 내 구조물. 민경식  소장은 붉은 파벽을 사용해 아웃도어(실외)같은 인도어(실내)의 느낌을 인테리어 했다. [㈜민경식건축연구소 제공]

2001년 공사 당시 촬영된 서울 중구 무교동에 있는 SFC몰 내 구조물. 민경식 소장은 붉은 파벽을 사용해 아웃도어(실외)같은 인도어(실내)의 느낌을 인테리어 했다. [㈜민경식건축연구소 제공]



-SFC몰은 설계한 지 20년이 훌쩍 지나도 최근에 지은 것처럼 세련된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건가요?

▶SFC를 설계하면서 가장 신경 쓴 인테리어 콘셉트는 ‘아웃도어(실외)같은 인도어(실내)’였어요. 광화문처럼 시간이 지나고 때가 묻을수록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는 인테리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전국에서 ‘파벽(Used Bricks)’ 10만장을 모았어요. 나무와 돌도 함께 사용해 실외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죠. 싱가포르투자청은 제 설계에 굉장히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건축가인 제 의도를 존중하고 기록해 해당 건물의 담당자가 바뀌어도 절대로 리모델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주고 있어요.


-소장님께서 걸어오신 길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대표작을 보니 ‘공간의 연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언제부터 이 같은 건축 철학을 가지게 됐나요?

▶저는 원래 건축이 아닌 조경을 전공했어요. 하지만 대학교 때부터 왜 건축가는 건축만, 디자이너는 인테리어만, 조경가는 조경만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죠. 공간의 연결성을 생각한다면 따로따로 자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우선 건축을 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건축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현대 건축에서는 김중업 선생님과 김수근 선생님께서 양대 산맥을 이루고 계셨어요. 그중에서도 김수근 선생님은 건축가이시지만 문화에 대한 다방면의 소양을 갖고 계셔서 ‘공간’이라는 설계회사뿐 아니라 잡지, 미술관, 극장 등을 모두 설립하셨었죠. 건축에 있어 모든 문화를 아우르면서, 또 한국성(Koreaness)에 근본을 둔 건축을 하고 계셔서 저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수근 선생님을 찾아간 게 바로 ‘연결’의 시작이었습니다.

-고(故) 김수근 선생님의 ‘공간’에 몸담은 게 그때부터였군요.

▶하지만 공간의 뉴욕지사를 설립하겠다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제가 1984년 뉴욕으로 떠난 지 2년 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스승이 돌아가신 후 한국에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국에서 더 경험을 쌓았어요. 설계 사무실에서 일도 하고, 인테리어 사무실에 들어가 실무도 익혔어요. 선생님 곁에서 함께 진행한 작품들이 좋은 포트폴리오가 됐죠. 그러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쯤, 한국에는 프로젝트가 넘쳐나는데 미국은 경기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김수근 선생님으로부터는 건축 인생에 있어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김 선생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편한 공간은 어머니 뱃속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으셨어요. 세상에 어머니 뱃속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건축할 때 외형만 생각하지 말고 그런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공간의 지배를 받거든요. 공간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는 거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살잖아요. 획일화된 공간에서 살다 보니 생각도, 인생도 전부 비슷해요. 사교육을 받아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또 결혼해서 좋은 아파트를 사야 한다고 생각하죠. 김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국 사회와 역사를 모두 아울러서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인간의 대면이 사라지는 IT 사회로 갈수록 건축의 연결이 더 중요해지겠다는 철학도 확고해졌고요.

-우리나라에는 아직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요, 향후 국내 건축업계를 어떻게 전망하나요?

▶저는 우리나라에 ‘건축가를 존중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에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못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프리츠커상이 건축물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순 없지만 일본이나 중국에서 꾸준히 수상자가 나오는 이유는 앞선 싱가포르투자청 사례처럼 프로젝트 발주처가 건축가를 존경하는 문화가 자리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우리나라 건축가가 존경받을 만한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건축가들이 많습니다.

그러려면 정부부터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공공건물을 발주할 때 정부는 물가 조절을 위해 설계비를 자꾸 깎으려고만 해요. 기획재정부에서 각 부처에도 지침을 내리는 식이죠. 공공공사도 이러니, 일반공사는 더하죠. 설계비를 내려깎는 관행이 없어져야 해요. 자본만 생각할 게 아니라 설계사의 의도나 예술성도 존중을 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홍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