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태생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왼쪽에서 세번째)가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지에스(GS)아트센터 공연이 끝난 뒤 소리꾼 유태평양과 남아공 출연자들의 즉흥 공연을 이끌고 있다. 지에스아트센터 제공 |
#1. 광산 노동자 차림의 남자 4명이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하고, 화면에 흐르는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에선 한 남자가 무언가를 놓쳤다가 되돌아가고 또 놓치기를 반복한다. 불길하게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춤과 드로잉과 합창이 뒤섞이며 공연은 아득하게 흘러간다. 서울 강남구 지에스(GS)아트센터가 지난 9~10일 선보인 ‘시빌’이다. 목탄 드로잉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오래된 카메라로 반복해 촬영하는 기법으로 잊히고 지워지고 왜곡된 사회적 기억을 복원해온 남아공 태생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70)가 특유의 예술세계를 압축해 보여준 무대였다. 공연을 진두지휘한 켄트리지는 관객들과 만났고, 서울 곳곳의 예술 현장을 둘러봤다.
전설적인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1978년 만든 드라마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 공연 장면. 노이마이어가 서울을 찾아 국립발레단을 지도했다. 국립발레단 제공 |
#2. 발레 공연인데 영화나 소설처럼 시간이 앞뒤로 흐르고, 기억과 감정이 교차한다. 공연엔 잘 쓰이지 않는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해서다. 국립발레단이 지난 7~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엔 창작자의 숨결이 생동한다. 1978년 이 작품을 만든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86)가 서울을 찾아 직접 단원들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현존 최고의 안무가’ ‘살아있는 전설’ 등의 수식이 붙는 발레의 거장이다.
현존 최고의 안무가로 불리는 존 노이마이어. 국립발레단 제공 |
서울이 비서구권에서 가장 뜨거운 예술 도시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서울을 찾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면면을 보면 과장이 아니라고 수긍하게 된다. 노이마이어와 켄트리지가 동시에 서울을 찾아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직접 풀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걸 말해준다.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은 “‘카멜리아 레이디’ 공연 기회를 얻는 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고 했다. 실제로 이번이 아시아 발레단 최초 공연이다.
남아공 태생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지에스아트센터 제공 |
켄트리지의 활동 반경은 전 지구적이다. 지난 1일 미국 뉴욕 하우저앤워스 갤러리에서 개막한 그의 전시회는 8월1일까지 이어진다. 지난달엔 영국 런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그의 영상과 함께하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앞서 캐나다에선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를 올렸고,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선 인형극을 선보였다. 서울에선 ‘시빌’ 공연에 이어 오는 30일 그의 몽타주 기법 영상과 함께 서울시향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들려준다. 그는 이미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으로 회고전을 열었고, 이듬해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오페라 연출을 했다.
스웨덴 태생 안무가 요한 잉거. 세종문화회관 제공 |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오는 18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발레단과 함께 ‘워킹 매드’ ‘블리스’ 두 작품을 공연하는 스웨덴 안무가 요한 잉거(58)는 독자적인 목소리로 국제적 명성을 쌓은 안무가다. 두 작품 모두 아시아 최초 공연이다. 지에스아트센터가 초대한 스페인 안무가 마르코스 모라우(43)도 세계 주요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4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무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안헬리카 리델(59)은 실험적 공연으로 유럽에서도 종종 논쟁을 유발하는 전위적 공연예술가다.
스페인 출신의 실험적인 공연예술가 안헬리카 리델. 국립극장 제공 |
서구에서도 최첨단을 달리는 예술가 5명이 이달 들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울을 찾았는데, 공교로운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공연장을 찾는 서울 관객의 눈높이가 예전과 달라졌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다수는 아니어도 실험적인 무대에 강하게 반응하는 관객이 있다”고 했다. 지난 9일 ‘시빌’ 공연 이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는 이런 관객의 존재를 확인시켜줬다. 켄트리지는 사회를 맡은 소리꾼 유태평양(33)에게 남아공 출연자들과 즉흥 무대를 제안했다. 아프리카 토속 음악과 유태평양의 ‘쑥대머리’ 가락이 어우러지자 관객 1명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호응했다. 이 관객은 “서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음악과 춤이 삶에서 숨 쉬는 것을 보고 에너지를 받은 경험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박선희 지에스아트센터 대표는 “인터넷은 물론, 해외 거주 경험이나 여행을 통해 서구 예술의 최신 흐름을 접한 관객의 요구를 공연장들도 외면하기 어렵다”며 “공급이 주도했던 과거와 달리 수요가 공급을 이끄는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짚었다.
서구에서 서울의 문화와 예술을 예사롭지 않게 보기 시작한 점도 첨단 예술가들이 앞다퉈 찾는 요인으로 꼽힌다. 안호상 사장은 “런던과 뉴욕에서 한국 공연 콘텐츠에 대한 인식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실감했다”며 “한때 주목받던 홍콩이나 상하이가 정치적 요인으로 쇠퇴하면서 서울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예술 도시로 떠오른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케이(K)팝,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등 한국 문화 콘텐츠의 전반적인 상승 흐름이 배경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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