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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미술판 감상 초점은 광주·서울서 활짝 핀 미디어아트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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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미술판 감상 초점은 광주·서울서 활짝 핀 미디어아트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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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는 이이남 작가의 대표작인 ‘산수극장’. 노형석 기자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는 이이남 작가의 대표작인 ‘산수극장’. 노형석 기자


희뿌연 안개 속을 서성거렸다. 슬며시 그늘 같은 무언가가 다가온다. 댓잎들이 서로 비비며 싹싹거리는 대나무숲 물결이 눈앞에 들어왔다 사라져 간다. 쏴아 하는 바람 소리가 함께 지나간다. 너른 전시장은 담양의 대숲에서 깊고 그윽한 담양 병풍산 계곡 바위들과 개울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전통 산수화 속으로 들어가 둘러보는 듯한 기분이다. 빛과 그림자로 천변만화하는 세상 요지경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아트만의 경이로운 예술력을 느끼는 순간이랄까. 전시장 말미에 감상의 후식처럼 노을과 월광이 비친다.



중견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작가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 펼친 초대 개인전 ‘이이남의 산수극장’(7월6일까지) 말미 하이라이트 공간 ‘산수극장’의 풍경이다. 작가의 고향 담양의 아련한 산수풍경의 기억을 다층적인 디지털 미디어아트 설치 공간으로 풀어냈다. 허련 등 남도화단 대가들이 그린 남도 산수화와 담양 대나무숲의 실사 이미지 등을 디지털매핑 기법으로 차용한 영상이 여러 층으로 겹쳐진 천 스크린 위로 다기하게 투사된다. 바닥에는 그림 속 경물을 본떠 합성수지로 만든 바위와 암산의 조형물이 놓였다. 이런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지며 디지털 산수풍경의 신세계를 풀어놓는다. 작가는 유년 시절 기억에 남은 담양의 자연 풍경을 의식하며 연출했지만, 관객 누구나 각자 기억을 투사하며 풍경을 역동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MAP)에서 열리고 있는 임용현 작가의 개인전 ‘포스트 제네시스: 새로운 연대’의 대표작 ‘태풍’. 급속도의 기술 개발과 거대 규모의 대중적 활용으로 갈수록 태풍처럼 강력해지는 디지털 사회의 실체를 번개 같은 섬광이 비치는 태풍 기둥으로 표현했다. 노형석 기자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MAP)에서 열리고 있는 임용현 작가의 개인전 ‘포스트 제네시스: 새로운 연대’의 대표작 ‘태풍’. 급속도의 기술 개발과 거대 규모의 대중적 활용으로 갈수록 태풍처럼 강력해지는 디지털 사회의 실체를 번개 같은 섬광이 비치는 태풍 기둥으로 표현했다. 노형석 기자


이뿐 아니다. 올봄 한국 미술판에서 특출한 감상 초점은 빛의 고을 광주와 디지털 전광판의 메카 서울에서 활짝 핀 미디어아트 전시들의 요지경이다. 광주에선 이이남의 디지털 기억 저장소를 보고, 광주천 인근 미디어아트 전용관 광주 지맵(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으로 걸어가 젊은 미디어아티스트의 발칙한 2인전(6월15일까지)을 만난다. 이종 인공지능(AI) 생명체의 패션모델 같은 자태와 디지털 매체가 몰고 온 격변을 상징하는 불온한 태풍 기둥 조형물 등으로 형상화한 양숙현·임용현 작가의 작품이다.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에서 열고 있는 양숙현 작가의 미디어아트 특화전 ‘사변적 물질’의 주요 출품작 중 하나인 ‘로봇생태계의 외래종’(2023). 인간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다기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외래종 로봇들의 이미지를 선보인다. 노형석 기자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에서 열고 있는 양숙현 작가의 미디어아트 특화전 ‘사변적 물질’의 주요 출품작 중 하나인 ‘로봇생태계의 외래종’(2023). 인간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다기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외래종 로봇들의 이미지를 선보인다. 노형석 기자


서울은 결이 다르다. 강남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는 40여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참여했던 중동 사우디 리야드 아파트 건설 현장의 역사를, 석유를 궁극적 화두로 삼은 디지털 아트 판타지 역사 무대로 꾸려낸 김아영 작가의 영상 파노라마 전시(6월1일까지)가 펼쳐지고 있다.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의 생전 인터뷰 육성을 편집해 그가 표출하려 한 시공간 개념을 새롭게 뜯어보는 ‘전지적 백남준 시점’(내년 2월22일까지)을 차렸고, 부산에서는 세계적인 디지털 셀레브리티(유명인사)와 디지털 작가들의 영상 패널판들이 미디어아트 축제 ‘루프 랩 부산’의 주축 전시로 해운대 부산시립미술관 정원의 저녁을 밝히는 중이다.



중동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부친의 기억을 담은 김아영 작가의 미디어아트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의 한 장면. 노형석 기자

중동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부친의 기억을 담은 김아영 작가의 미디어아트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의 한 장면. 노형석 기자


이 요지경들의 공통점은 첨단 디지털 기술과 아티스트의 상상력이 결합된 인문적 시각예술을 좇는다는 점이다. 흔히 미디어아트 하면 ‘빛의 벙커’ 기획전처럼 명화들을 흘러가는 확대 동영상으로 만들어 입체감을 높인 미디어 블록버스터 전시나 서울 삼성동 코엑스, 세종대로를 현란하게 물들이는 대형 광고전광판의 행렬,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의 실감 역사 영상 등을 연상하곤 한다. 하지만 최근 이와 다른 각도와 감성의 결로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언어를 개척하려는 소장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이남 작가는 편안하고 친근한 전통산수화를 고향과 향수라는 코드를 통해 대중적으로 풀어낸 것이 강점이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 펼쳐온 명화 차용과 현실 이미지의 결합이란 도식이 고답적으로 되풀이되고 의미와 해석의 층위가 얇고 단순하다는 맹점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또 다른 건너뛰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서 열리고 있는 백남준 팩토리 아카이브전 ‘로봇드림’의 전시장 모습. 미국 신시내티에 있었던 백남준 팩토리(공방)의 기술협업자 마크 패츠폴이 보존한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 백남준 로봇의 창작 과정을 살펴보는 자리다. 노형석 기자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서 열리고 있는 백남준 팩토리 아카이브전 ‘로봇드림’의 전시장 모습. 미국 신시내티에 있었던 백남준 팩토리(공방)의 기술협업자 마크 패츠폴이 보존한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 백남준 로봇의 창작 과정을 살펴보는 자리다. 노형석 기자


김아영 작가는 중동에서 일했던 부친의 기억을 살린 10년 전 사운드 연작을 발전시킨 이번 신작을 통해 여느 미디어 작가와 다르게 이야기와 이미지를 꾸려내는 크리에이터의 역량을 보여줬지만, 부친의 기억과 건설된 아파트의 후일담, 석유의 지정학적 상징성 등 층위가 다른 이야기들이 인공지능 애니메이션까지 동원한 현란한 영상 속에 복잡하게 뭉치고 뒤얽힌 얼개여서 방향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갈래잡기가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광주 지맵에 차린 두 젊은 아티스트들의 근작전은 담론과 형식의 완성도가 미흡하긴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 디지털 아트의 방향성에 대한 날 선 고민을 절절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백남준이 1975년 만든 ‘촛불 티브이’. 백남준아트센터의 기획전 ‘전지적 백남준 시점’에 나왔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백남준이 1975년 만든 ‘촛불 티브이’. 백남준아트센터의 기획전 ‘전지적 백남준 시점’에 나왔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부산시립미술관의 ‘루프랩 부산’은 국내외 아티스트들의 작업 흐름을 꿰어 주요 트렌드와 변화의 전망을 모색하는 최초의 디지털 아트 페스티벌이란 점에서, 백남준아트센터의 ‘전지적 백남준 시점’은 컬렉션 기획전의 본격적인 진화와 디지털 시대에 맞는 전망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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