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런 서점] [15] 인천 중앙동 문학소매점
지하철 1호선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걸었다. 붉은 건물들 사이 짜장면박물관이 있었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을 지나자 거리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과거 일본 조계지였던 지역의 일본풍 목조 건물들이 늘어섰다. 걷다 보니 ‘문학소매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인천 중앙동 개항장 거리에서 책방 ‘문학소매점’을 운영하는 정웅(42) 대표가 기자를 맞았다. 2021년 3월 문을 연 서점은 한국 문학만 취급한다. 8평 남짓한 공간에 시·소설·에세이 등이 빼곡히 들어찼다. 한국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방문을 추천한다.
작은 공간이지만 알찬 서가에 놀랄 것이다. 기자는 이곳에서 몇 달간 찾아 헤맨 품절 도서(‘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를 구했다. 이 밖에 정성스러운 책 포장부터 때마다 바뀌는 영수증에 인쇄된 소설 속 문구까지. ‘한국 문학 덕후(마니아)’를 설레게 할 요소가 가득하다.
인천 중구 개항장 거리에 위치한 책방 '문학소매점' 입구에서 정웅 대표가 포즈를 취했다. /박성원 기자 |
인천 중앙동 개항장 거리에서 책방 ‘문학소매점’을 운영하는 정웅(42) 대표가 기자를 맞았다. 2021년 3월 문을 연 서점은 한국 문학만 취급한다. 8평 남짓한 공간에 시·소설·에세이 등이 빼곡히 들어찼다. 한국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방문을 추천한다.
작은 공간이지만 알찬 서가에 놀랄 것이다. 기자는 이곳에서 몇 달간 찾아 헤맨 품절 도서(‘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를 구했다. 이 밖에 정성스러운 책 포장부터 때마다 바뀌는 영수증에 인쇄된 소설 속 문구까지. ‘한국 문학 덕후(마니아)’를 설레게 할 요소가 가득하다.
◇한국 문학에 빠진 ‘공돌이’
남들이 사업을 접던 코로나 시기. 정 대표는 반대로 서점을 열었다. 그는 10여 년 이상 자동차 엔진 설계를 해 온 엔지니어였다. “내연 기관 연구는 거의 완성 단계예요. 전기차 시대가 왔기 때문에 제가 할 일이 없어졌죠. 그러자 ‘번 아웃’이 오고 일에 재미를 못 느끼는 상태가 됐어요.”
그는 퇴사 후 과일 가게와 서점 중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6개월 정도 과일 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 “나름 잘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과일은 그렇게 안 좋아하더라고요. 잘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 중에 고민하다가 책방을 열게 됐습니다.”
본지와 인터뷰 중인 정웅 대표. /박성원 기자 |
문학에 큰 뜻이 있었던 걸까. 그건 아니란다. “방구석에서 혼자 책 읽던 공돌이예요.” 그러나 초·중·고 시절부터 조용히 책을 읽어온 공학도가 한국 문학과 지독히 얽힌 계기가 있다. “2005년 지금은 없어진 경비교도대에서 군 복무를 하던 때였어요. 수용자들이 책을 정말 많이 읽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솔직히 교도관들보다 유창하고 어휘력이 좋았어요. 물론 사기꾼이어서 말을 잘했을 수도 있지만….”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서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차츰 한국 문학으로 취향이 좁혀졌다. 당시 가장 강렬하게 읽은 책은 황석영의 ‘개밥바라기 별’. 정 대표는 “생생한 저잣거리 말투에 빠졌다”고 했다. “처음엔 일본 문학과 해외 문학을 많이 보다가 한국 문학을 읽기 시작했는데 문장이 다른 거예요. 소시지와 생고기의 차이랄까. 가공된 맛이 전혀 안 느껴지는 그 매력에 빠졌습니다.”
정웅 대표는 "엔지니어들 사이에선 문학 책을 읽는다는 게 쓸데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다"며 "회사에서는 절대 책을 꺼내지 않았다"며 웃었다. /박성원 기자 |
2008~2009년쯤부터 한국 문학을 위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한국 문학 전문 서점을 냈다. 개업 첫날 소설가 김연수가 찾아오는 기분 좋은 우연도 있었다. “이 동네에 짜장면 드시러 오셨다가 서점에 오셨대요.”
◇단골과 함께하는 서점
‘문학소매점’은 단골과 함께 만들어가는 서점을 지향한다. 서가 곳곳에 포스트잇과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었다. 책의 어느 부분을 필사한 것이다. 책방을 자주 찾는 단골손님들이 장식했다. 반대편 서가엔 아예 단골손님 전용 서가도 있다. 이름하여 ‘문학 중매점’. 칸마다 단골손님의 이름을 명찰로 제작해 붙여뒀다.
책방 지기가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서점을 찾는 이들이 책을 추천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독자와 또 다른 독자가 서점을 매개로 연결된다. “한국문학을 중심으로 하지만 책방 주인의 취향으로 만들어진 서점보다, 단골분들 취향으로 만들어진 서점으로 바뀌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 대표의 철학이다.
문학소매점 내부 '문학 중매점' 서가. /박성원 기자 |
15명 내외의 ‘진성 단골’들과 갖은 이벤트를 한다. 한 달에 1~2회 정도 책을 보내주는 구독 서비스 ‘설렘’을 진행 중이다. 지난 한 달간 서점에서 그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신간을 구독자에게 보내준다. 다 읽고 나서는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감상을 나눈다.
지난 한 달 동안 요즘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뜨는 ‘이세계(異世界)물’을 표방한 이색 이벤트를 진행했다. 다른 세계로 옮겨가 경험치를 얻고 레벨업을 하는 것이 ‘이세계물’의 공식. 이와 비슷하게 ‘문학소매점 길드원’을 모았다. 독자를 ‘문학 세계를 구하기 위해 소환된 용사’로 봤다. 가입비 1만원을 내고 각종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책을 살 수 있는 가상의 재화 ‘문소(문학소매점의 줄임말)’를 줬다. 게임을 하듯 책을 읽는 이벤트다.
서점을 찾은 손님들이 책을 살펴보고 있다. /박성원 기자 |
◇독자의, 독자에 의한, 독자를 위한
‘독자 지향적’인 이 서점은 주 7일 문을 열고, 가끔 한 달에 한 번씩 쉰다. 운영 시간은 오후 1~8시. ‘왜 이리 안 쉬나’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자영업자들 다 힘들잖아요. 그런데 서점이 주 5일을 하면서 힘들다고 말할 자격이 있나 생각을 해요.”
주중엔 한가한 편이지만, 주말엔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날이 좋은 주말엔 하루 평균 300~400명 정도가 찾는다. 서점을 찾는 이의 95%는 여성. 방문객은 20대가 가장 많고, 구매율은 40대가 높다. 서점가 문학 도서 구매 추이와 비슷하다.
인터뷰를 하다 놀라게 되는 순간이 자주 있었다. 구독 서비스 배송료나 각종 이벤트 등에 대표가 사비(私費)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정성스레 종이로 싸 끈으로 묶고 실(seal)까지 찍어주는 책 포장도 무료다.
정웅 대표가 책을 포장하는 모습. 연습의 결과물이다. 정 대표는 "선물 받았을 때 '아, 멋지다'라고 느낄 정도의 선물 포장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박성원 기자 |
구독 서비스 '설렘' 책 포장(왼쪽)과 일반 책 포장. /박성원 기자 |
정 대표는 “책 사는 분들께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며 덧붙였다. “지난겨울 팔로워 1만명이 넘은 ‘문학소매점’ 인스타그램 계정이 이유도 모른 채 정지되고, 히터가 고장 났어요. 매출이 떨어지고 갑자기 너무 큰돈이 들어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뭘 사고 싶거든요. 제가 사고 싶은 건 없다 보니까, 독자분들에게 이걸 풀어보자.” 독자를 위한 이벤트를 열며 재정난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푸는 책방 지기는 처음이었다.
문학소매점의 PICK!
●주목할 만한 신간 2권=이수정의 장편소설 ‘단역배우 김순효씨’(다산책방). 누군가 나의 굄돌이 되어 준다면, 내가 누군가의 굄돌이 되어 준다면, 세상은 살 만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시영의 에세이 ‘죽이고 싶은 엄마에게’(달). 평범한 엄마, 보통의 엄마를 꿈꿨던 모든 자녀와 이 책을 함께 읽고 싶다.
●뜻밖의 베스트셀러=장은진의 장편소설 ‘부끄러움의 시대’(자음과모음). 지난해 10월 출간된 이 책은 ‘문학소매점’에서만 약 150권이 팔렸다. 서점을 찾는 이들에게 꾸준히 추천해왔다. ‘인생책’은 아니겠지만, 누가 읽어도 재밌을 책.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김금희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 등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많은 이유를 거리를 거닐며 곱씹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인천=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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