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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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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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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24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로마의 난민수용소를 방문해 난민의 발을 씻긴 뒤 고개 숙여 입을 맞추고 있다. 로이터

2016년 3월24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로마의 난민수용소를 방문해 난민의 발을 씻긴 뒤 고개 숙여 입을 맞추고 있다. 로이터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최선의 모습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가 대변한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그가 삶으로 체현한 그리스도가 내가 ‘기독교 무신론’이라는 개념 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깊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인간 사이에 참된 사랑이 존재할 때마다 그 자리에 있는 매개자라고 본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18:20)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서 4:8)에서 드러나듯이, 그리스도는 사랑의 주체도 객체도 아닌, 사랑 그 자체다. 구약의 계명은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였지만, 예수는 그 사랑의 대상을 신이 아닌 이웃으로 옮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사람이라기보다, 그리스도처럼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성경은 사랑을 에로스(성적 사랑), 스토르게(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필리아(성적이지 않은 사랑 또는 우정), 아가페(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무조건적 사랑)의 네가지로 구분한다. 아가페의 차원에서 감정은 부차적이며, 중요한 것은 대의에 헌신하는 동지들의 평등한 공동체다. 그래서 아가페란 테리 이글턴의 철학이 지적하듯 ‘정치적 사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실천으로,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는 철저한 헌신과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그리스도는 사랑을 명령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매개로 인간들이 서로 직접 연결되어 공동의 대의에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가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이었다. 오늘날 ‘평화’는 전쟁을 정당화할 때(“평화 개입”) 또는 현실과의 감정적 거리 두기를 조장할 때(“내면의 평화”) 사용되곤 한다. 우리는 이런 왜곡을 넘어 그리스도가 말한 평화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그 평화는 개인의 심리 상태나 먼 미래의 이상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한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마태오 26:38) 그는 깊은 취약성 속에서 단 하나를 요청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대다. 이유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곁에 있어달라는 연대의 요청이다.



진정한 기독교적 회의의 본질은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과연 믿음이 요구하는 삶 전체에 나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신학은 정치적이며,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떤 책임을 지며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나는 이탈리아 주교 라파엘레 노가로의 “예수를 꼭 믿을 필요는 없다. 사랑이면 충분하다”라는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스도의 도래는 예정되었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우리는 그 이전의 역사가 마치 그것을 예고했던 것처럼 다시 읽게 된다. 사랑, 윤리적 투쟁, 심지어 신의 운명조차도 사건 이후에 소급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철학자 발터 베냐민이 말했듯이, 현재의 투쟁은 현재의 운명뿐 아니라 과거의 실패까지도 구원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절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기독교 무신론자로서 나는 그가 정의와 연대를 위한 우리의 투쟁 속에서 부활해 우리 안에 계속 살아 있다고 믿는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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