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소 화백 개인전 ‘무제’
까맣게 신문지 채운 무수한 선
비움과 채움·지움과 그림 성찰
우손갤러리 서울서 6월까지
까맣게 신문지 채운 무수한 선
비움과 채움·지움과 그림 성찰
우손갤러리 서울서 6월까지
‘Untitled 0211024’(120x80cm). [우손갤러리] |
고작 종이 한 장일뿐인데 바라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볼펜 잉크로 선을 그어 채운 까만 신문지, 그 검은 표면을 보노라면 숭고한 감정까지 몸을 휘감을 정도다.
최병소 화백(82)의 개인전 ‘최병소의 무제’가 24일 서울 성북동 우손갤러리 서울에서 개막했다. 볼펜 한 자루를 손에 쥔 팔순의 노작가는 무수히 많은 사선을 반복적으로 긋는 행위를 통해 예술의 검은 심연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무제 0211024’는 세로 160cm, 가로 120cm 남짓한 검은 신문지, 아니 검은 캔버스다.
그는 신문지 위에 자를 대고 비스듬히 그은 뒤, 같은 방향으로 모나미153을 그어 볼펜 잉크로 신문지를 꽉 채웠다. 반복적으로,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최병소의 손에서 탄생한 검은 회화는 광물질의 표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독특한 표면으로 전환된다. 그의 행위는 ‘긋기’일 뿐이지만 결과물은 ‘지우면서 그리기, 비우면서 채우기’가 된다. 신문에 담긴 정보는 사라지고 새로운 검음이 화면을 채운다. 비움과 채움, 지움과 그림. 최병소의 캔버스는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불명확한 행동의 의미 속에서 전개한다.
반복적으로 긋는 과정에서 얇은 신문지가 찢어지고 만다는 사실도 주목을 요한다.
신문지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볼펜과 접촉하면서 본래의 반들반들한 물성을 잃고, 자꾸만 찢어진다. 마치 가시 돋친 파도이자 ‘육중한 비늘’처럼 다가온다. 인간의 언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지리멸렬한 세상을 휩쓸어버리는 노작가의 광대한 힘이 고작 모나미153 볼펜 몇 자루로 완성된다는 사실은 그의 철학적 사유를 응축한다. 볼펜 한 자루도 전위(前衛)가 될 수 있음을 최병소는 말해준다.
또 다른 작품 ‘무제 0220529’는 1883년 출간된 미국 유명 잡지 ‘LIFE’의 표지를 캔버스 삼은 작품이다. 표지 상단에 ‘LIFE’라 적힌 붉은 사각만 제외하고 모두 볼펜과 연필로 그었다.
‘Untitled 0220529’(35X26cm). [우손갤러리] |
최병소 작 ‘Untitled 0240205’를 근접 촬영한 사진. [우손갤러리] |
세계를 채우는 무수한 언어는 최병소의 펜끝에서 휘발되지만, 결국 삶(life)은 지워질 수 없는 무엇임을 최병소의 작품은 증명해낸다.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점에서 최병소의 종교적인 수행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과거 학창시절 학생들에게 주어졌던 체벌의 한 종류인 ‘깜지 쓰기’는 고통을 유발했는데, 최병소의 ‘숭고한 깜지’는 예술가에게 주어진, 그러나 회피할 수 없는 어떤 형벌이라고까지 느껴질 정도다. 최병소에게 한 자루의 펜은 세상을 무화시키고, 말없이 설득하려는 강력하고도 은유적인 ‘칼’처럼 보인다.
전시는 6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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