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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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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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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인간은 임신 중인 인간이며 출산하고자 하는 인간이다. 출산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출산하고자 하는 것, 창조하고자 하는 것 중에는 정의로운 나라도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인간 안에 있는 에로스는 불의한 나라를 폐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를 가르쳐주는 여사제 디오티마. 위키미디어 코먼스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를 가르쳐주는 여사제 디오티마. 위키미디어 코먼스


20세기 영국 소설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는 자신이 장편소설(노블)을 쓰는 작가라는 데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밝힌 바 있다. “소설가인 까닭에 나는 내가 성자·과학자·철학자·시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장편소설만이 인간 삶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포착한다는 것이 로런스 자부심의 근거다. 장편소설은 “둘도 없이 빛나는 생명의 책”이다. 로런스는 그런 장편소설을 쓴 작가에 철학자 플라톤을 포함하고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기이한 작은 장편”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의 ‘향연’(심포시온, symposion)은 로런스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대화편에는 철학의 고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삽화가 여럿 등장한다. 시인 아가톤의 비극 경연 우승을 축하하는 연회에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모인다. 의사 에릭시마코스가 사랑의 신 에로스(Eros)를 찬미하는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하자고 제안하자 좌중이 동의한다. 몇 사람의 연설이 끝나고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차례가 왔을 때 갑자기 딸꾹질이 일어나 멈추지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옆자리의 에릭시마코스에게 기회를 넘기면서, 딸꾹질 멈추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에릭시마코스가 세가지 처방을 내준다. ‘먼저 숨을 들이마시고 참을 것. 그래도 안 멈추면 입 안에 물을 머금고 가글을 할 것. 그 방법으로도 효과가 없으면 깃털 같은 것으로 콧속을 간질여 재채기를 할 것.’ 로런스 말대로 이 대화편이 ‘소설’이 아니라면, 한없이 진지한 책에 왜 이런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세번째 방법까지 쓰고야 재채기가 멈춘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릭시마코스에 이어 연설을 시작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신화를 끌어들여 인간이라는 종족의 애초 모습이 어땠는지부터 이야기한다. 처음에 인간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가 각각 한몸을 이룬 세 종류였다. 그런데 이렇게 둘이 붙어 하나가 된 인간들은 힘이 무척 세고 자만심이 넘쳐 신들에게 덤벼들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제우스가 벼락을 내리쳐 인간들을 두쪽으로 나누어버렸다. 반쪽이 된 인간은 그때부터 본디 한몸이었던 다른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됐다. “우리는 처음에 온전한 전체였다. 사랑(에로스)이란 전체가 되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갈망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끝나자 잔치의 주인공인 아가톤이 말을 받아 에로스가 어떤 신인지 이야기한다. 에로스는 가장 젊은 신이며 꽃이 만발한 향기로운 곳에 머무는 우아한 신이다. 에로스는 가장 아름다운 신이고 가장 훌륭한 신이며 가장 행복한 신이다. 에로스는 정의롭고 절제 있으며 용감하다. 에로스는 지혜롭기도 하다. 사랑에 빠지면 모두 시인이 되니 에로스야말로 창작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지혜로운 신 아닌가. 흥이 오른 아가톤은 에로스 찬양을 운문으로 끝낸다. 에로스는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바다에는 바람 한점 없는 잔잔함을, 바람에는 휴식을, 근심에 시달리는 이에게는 단잠을” 선사한다. “괴로울 때, 두려울 때, 그리울 때, 말할 때 에로스는 가장 믿음직한 키잡이요 보호자요 전우요 구원자다.” 아가톤이 말을 마치자 박수가 쏟아진다.



이제 남은 사람은 소크라테스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이 좋은 말을 다 해서 자기는 할 말이 없게 됐으니 에로스 찬미는 그만두고 에로스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해보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특유의 문답법으로 아가톤에게 묻는다. “에로스는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인가, 아닌가?” 에로스는 사랑이고 사랑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니 아가톤은 아니라고 답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다시 묻는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인데,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그것을 아직 소유하지 못했다는 뜻 아닌가? 이번에도 아가톤은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욕망하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에로스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라면, 에로스에게는 아름다움이 결핍돼 있음이 분명하다.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에게 다시 묻는다 “아름다움이 결핍된 자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전히 에로스가 아름답다고 주장할 텐가?”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아가톤이 고백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어떤 존재인가? 소크라테스는 만티네아라는 땅의 여사제 디오티마에게서 들었다며 에로스 탄생에 얽힌 신화를 들려준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났을 때 신들이 큰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잔치판에 포로스(Poros)도 끼어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잔치 때면 나타나는 페니아(Penia)가 구걸하러 와 문간에 서성였다. 포로스는 넥타르에 취해 제우스의 정원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그러자 페니아가 포로스의 아이를 갖기로 작정하고서 포로스 곁에 누워 에로스를 잉태했다.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시종이 된 것은 아프로디테 생일잔치 때 잉태된 데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에로스 탄생 신화는 에로스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에로스의 어머니 페니아는 말뜻 그대로 가난과 궁핍과 결핍의 여신이다. 바로 그런 본성을 물려받은 탓에 에로스는 언제나 가난하다. 또 우아하고 아름답기는커녕 딱딱하고 거칠고 맨발인 데다 집도 없다. 대문 밖이나 길바닥에서 거적도 없이 잠을 잔다. 그러나 에로스는 아버지 포로스의 피도 이어받아 반대의 모습도 지녔다. 포로스는 길을 뜻한다. 막힌 곳을 뚫어 만든 통로가 포로스다. 그러므로 포로스는 곤경을 벗어나게 해주는 방도고 방편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본성을 함께 받았기에 에로스는 결핍 속에 있으면서 결핍을 뚫고 나갈 길을 찾는다. 궁지를 뜻하는 아포리아(aporia)는 ‘포로스 없음’ 곧 길이 막혔음을 뜻한다. 에로스는 페니아의 아들이기에 길 없는 궁지에 갇혔지만, 포로스의 아들이기에 궁지에서 벗어날 길을 끝내 찾아낸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무지와 지혜의 중간에 있는 자임도 강조한다. 에로스가 신들처럼 지혜롭다면 궁지에 빠질 일이 없다. 그러나 에로스가 무지하기만 하다면 궁지를 빠져나갈 길을 찾을 일도 없다. 왜냐하면 “무지의 문제점은 아름답지도 훌륭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자가 그런 자기에게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무지다. 그런 무지에 갇힌 자는 자기에게 무엇이 결핍돼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러기에 결핍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를 발동하지도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그려 보이는 에로스는 노력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은 무지와 지혜의 중간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지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에로스는 인간 안에 깃들어 있다. 에로스를 품은 인간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반쪽’을 끌어들여 이야기한다. “반쪽이든 전체든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면, 사랑은 반쪽도 전체도 찾지 않는다. 사람은 병들었다 싶으면 자기 발이나 손도 절단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를 품은 인간이 아름다운 것을 향해 나아가 그 아름다운 것 안에서 좋은 것, 훌륭한 것을 낳고자 한다고 말한다. 노력하는 인간은 임신 중인 인간이며 출산하고자 하는 인간이다. 출산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출산하고자 하는 것, 창조하고자 하는 것 중에는 정의로운 나라도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인간 안에 있는 에로스는 불의한 나라를 폐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에로스는 세상을 바꾼다.



돌아보면 우리는 지난 몇달 동안, 아니 지난 몇년 동안 그 에로스의 힘으로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온 힘을 모았다. 윤석열 정권이 나라를 망가뜨리는 동안 그 파괴를 보면서 분노하고 발을 굴렀다. 가난한 페니아처럼 눈발이 흩날리는 맨땅에서 농성하고 노숙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길을 뚫었다. 우리 안에 있는 에로스의 힘은 생명의 힘이고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불화를 감내한다.



그리스 신화 작가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에리스(Eris, 불화·싸움)가 우리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에리스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해로운 에리스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전진시키는 이로운 에리스다. 해로운 에리스는 파괴하고 이로운 에리스는 창조한다. 그 창조하는 에리스의 다른 이름이 에로스다. 에로스의 힘은 자기 파괴적 증오를 이기고 멀리 간다. 에로스는 정의로운 나라를 잉태하고 출산한다.











고명섭 | 언론인.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kallipolis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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