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2 (토)

[유석재의 돌발史전] ‘고약하다’란 말이 ‘고약해’란 사람에서 유래됐다고?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세종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미화 탓이었다는데...

조선일보

세종 때 문신 '고약해'의 이름이 '고약하다'는 말의 어원이 된 것처럼 소개한 2018년 10월 14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한 장면. /MBC


말이나 사물의 유래(由來)에 대해, 특히 21세기에 들어 잘못 알려진 것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쌍팔년도’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단기 4288년에 해당하는 1955년이었습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18/2018071800079.html)

얼마 전에는 이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1943년에 발표된 만요(만담 가요) ‘빈대떡 신사’에서 ‘양복 입고 뽐을 내며 요릿집에 들어간 뒤 뒷문으로 도망치다 붙잡혀 매를 맞은 신사’란 다름아닌 시인 백석(1912~1996)이었다고요. 궁금해서 그 근거를 찾아봤는데 결론은 이런 이상한 삼단논법이었습니다.

①가요 ‘빈대떡 신사’는 당시 경성 시내를 으스대며 다니던 모던보이들을 풍자한 노래다.

②당시 모던보이의 대표적인 인물은 백석이었다.

③그러므로 ‘빈대떡 신사’의 주인공은 백석이다.

조선일보

1937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 시절 백석의 강의 모습./조선일보 DB


‘백석’은 ‘모던보이’의 충분조건일 뿐 필요조건이 아니므로 이 삼단논법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일각에선 이걸 진짜로 믿는 모양입니다. ‘백석을 따라 양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풍자한 노래’라는 다소 완화된 설명도 있지만 역시 어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나, 최근 TV 프로그램에서 ‘요건 몰랐지’ 류의 새로운 상식처럼 들고 나오는 얘기 중의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고약하다는 말의 유래는 세종 때 문신 ‘고약해’에서 나온 것이다.”

고약해(高若海·1377~1433)란 인물은 실제로 세종대왕 때 형조참판과 개성부유수 등을 지낸 문신입니다. 1413년(태종 13)에 발탁된 인물로 종2품 높은 벼슬에 오르는 과정에서 세종과 의견이 달라 여러 차례 충돌했습니다.

이렇게 임금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직언을 계속한 고약해를 두고 세종은 ‘이런 고약해 같은…’이라며 분노했고 ‘고약해’는 ‘고약한’ ‘고얀’이란 말의 어원이 됐다고 합니다. 비위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고약하다’는 말의 어원이 ‘고약해’란 이름에서 나왔다는 얘기죠.

정말 그랬을까?

어떤 사람은 “우리말은 절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고약하다’의 어원을 이렇게 분석합니다. ‘굉장히’란 말이 ‘고이’로 줄었고 ‘악독하다’ ‘악랄하다’는 뜻의 ‘악하다’와 결합해 ‘고이+악하다’, 즉 ‘고약하다’가 됐다는 겁니다. 이쪽이 훨씬 논리적으로 보입니다만.

그럼 ‘고약해’란 사람은?

최근 단행본 ‘우리말에 깃든 조선 벼슬’(서해문집)을 쓴 조선시대사 연구자 이지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약하다’의 어원을 고약해로 설명하고 있는 신문 기사, TV 프로그램, 책들을 살펴보면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약하다’의 어원과 관련된 조선시대 사료 역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죠. 다만 ‘세종실록’에서 세종과 고약해의 의견이 충돌하는 기록만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고약해가 ‘고약하다’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2010년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얘기는 왜 지어졌을까요? 첫째, 고약해에게는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하는 대간(臺諫)’의 이미지가 씌워졌고, 둘째, 세종에게는 인간적으로는 속이 상하면서도 신하의 바른 말을 끝내 받아들이는 ‘바람직한 리더’라는 이미지를 투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약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신하의 의견을 받아들인 훌륭한 군주 세종’이라는 리더의 모습이 새롭게 쓰여졌다는 것이죠.

그러나 현실의 고약해는 그렇게 뛰어난 신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강원도 관찰사 시절 업무가 철저하지 않다는 보고도 있었고,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지낼 때는 사헌부 관원들끼리 서로 탄핵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세종은 그를 보고 “평소 바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일을 보니 그 마음이 간휼(姦譎)하다”며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황주 목사로 좌천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세종의 말을 중간에 끊고 자신을 ‘신(臣)’이 아니라 ‘소인(小人)’으로 지칭하는 말실수로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약해는 관찰사 시절 기생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말로는 ‘기생을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지훈은 고약해에 대해 ‘업무 능력이 특출나지 않았고, 학문도 인정받지 못했으며, 자기 의견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일을 그르치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고약하다’는 말의 어원이 될 정도의 능력과 태도를 보여 준 강직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죠.

세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뛰어나고 훌륭한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15세기 왕조 시대의 군주라는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21세기에 ‘본받아야 할 과거의 리더십’을 찾다 보니 세종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미화가 이뤄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여기서 나옵니다. 더구나 근거가 불분명한 말로 우리말의 유래를 따지는 것 또한 무척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돌발史전 구독하기

[유석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