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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13) 총과 권력 : 1970년대의 총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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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13) 총과 권력 : 1970년대의 총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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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부조리를 겨눈 ‘분노의 총성’
■ 총을 든 사람들

1981년 김홍신은 <인간시장>의 주인공 이름을 ‘권총찬’에서 ‘장총찬’으로 바꿔야만 했고, 그 덕에 그 이름은 어딘가 묘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권총을 장총으로 바꾼 것만으로 상상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소설 집필 20여 년 전, 짙은 선글라스에 권총을 차고 등장한 이들은 이제 사라진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후예들이 똑같은 권력을 휘두를 만큼 세상은 별로 변한 게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총 한 자루는 여전히 권력의 상징이자 권력 그 자체를 상기시키는 실체로 군림하고 있었다. 총을 든 이들이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이래, 그 중심부 인사들은 총을 실질적인 힘을 과시하는 도구로 진지하게 활용했다. 번번이 총부리를 겨누었다던 경호실장 ‘피스톨 박’이 총을 내려놓게 된 것이 문세광의 탄환 때문이었던 것이고 보면, 총은 권력 기제 속에서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톱니바퀴였던 셈이다.

총이 얼마나 대단한지, 군사정권 하에서 총은 절대적인 힘의 상징이었고, 의심받을 수 없으며, 함부로 공유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총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큰일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1970년대에 총기 사건은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한다. 무장 탈영병의 난동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민간 영역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은 군사정권의 통제력을 의심케 만든다. 1970년대를 연 총기 사건이 바로 ‘정인숙 살해사건’이다. 지금껏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이 사건은 당시 야당에서 권력형 스캔들 의혹을 제기할 만큼 큰일이었다. 그러나 범행에 쓰인 총기도 찾지 못한 채 사건 재판은 종결되었고, 언론에서도 이를 권력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았다. 대신 몇몇 사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윤리 차원에서 시도된 평가가 있었을 뿐이다.

정인숙

정인숙

한 신문기사는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신분이 제한된 우리 사회에서 볼 때 이런 사건의 실마리는 수사기관이 밝힌 점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기사 내용은 ‘인륜부재와 사회도덕의 타락을 집약한 사건’이라는 점만을 강조했다. 기사가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서구화로 인한 전통적 가족제도의 붕괴, 아버지의 부실한 가정교육, 그리고 형제의 열등의식 등이었다.(경향신문 1970년 3월21일자) 한국 사회에서 총이 가진 특수성을 이해하면서도 윤리 도덕이나 개인적 콤플렉스를 탓한 학자들의 진단에는 총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들어있다. 총기 사건은 권력 층위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우발적인 과오일 뿐이라는 것이 동의의 요지일 터다. 이들의 분석을 끝으로 진범의 존재는 물론, ‘소지할 수 있는 신분이 제한된’ 총이 어떻게 개인의 음란과 방탕의 죗값을 치르는 데 쓰였는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묻혀 버렸다.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총은 극도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총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지만, 그에 굴복해야 하는 권력을 직접 가리키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상징이자 실체라는 점에서 총은 쉽게 언급할 수도 없다. 총의 맥락을 삭제한 채 윤리 문제로 분석한 학자들의 발언 역시 독재를 직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한 1970년대의 시대적 증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1972년의 ‘방성자양 사건’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되었다. 전성기가 지난 여배우가 쏜 총에 도둑이 맞고 쓰러진 이 사건에는 공군장성이 개입된 병역비리와 난잡한 재벌 2세 등의 시대적 코드가 얽혀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곧 아름답게 봐달라는 유행어만 남긴 채 주간지의 흥밋거리로 떨어져버렸다.

■ 1970년대를 쏜 2인조 강도

권력의 상징으로서 총은 명확하게 분석되기를 거부했지만 1970년대 내내 총기 사건은 끊이지 않고 일상에 충격을 전했다. 일차원적인 총기 사고 외에, 총은 주로 범죄 도구로 쓰이며 왜곡된 힘을 과시했다. 범죄자들의 총은 은행, 금은방, 택시기사들을 표적으로 삼았고 인명을 앗아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권력의 차원에서 은폐되는 사이, 총이 가진 힘은 일상에서 범죄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재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교적 소규모 사건으로 이어지던 총이 일상의 한복판에서 폭발력을 발휘한 사건이 1974년 이종대, 문도석의 카빈소총강도 사건이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2인조 총기강도의 2년여에 걸친 범죄행각은 경찰과의 대치 중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파국으로 끝이 났다.

언론의 입장은 이전 총기 사건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이복형제의 멸시로 인해 중학 때부터 탈선’이라든지, ‘계모 구박에 부모 원망 포악해져’(동아일보 1974년 7월29일) 등의 소제목에서 보듯, 신문보도는 범죄의 원인을 개인의 불우한 과거에서 찾으려 했고 이종대, 문도석을 삐뚤어진 생각으로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 악인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총기강도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결말의 참혹함이었다. 자식과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로까지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종대는 유서에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고, “태양아, 큰별아 아빠를 용서해줘, 너희들 뒤따라간다. 황천에 가서 집 마련해서 호화스럽게 살자. 냉혹한 세상에 미련 없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여기에 잔학한 살인강도 대신 한 가장의 극단적인 비정이 묻어났음은 물론이다. 언론에서는 유서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과 상상은 사건 너머에 이른다. 박완서는 “아무리 죽도록 일해봤댔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든지 했을 건 뻔한 일이다. (중략) 여기에도 간단하게 극악무도하다고만 단정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는 있다고 본다”(‘비정’,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평민사, 1977)라고 말하며, 그들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책임을 우리 사회가 나누어 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최인호는 <지구인>에서 두 사람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잔인한 범죄의 또 다른 원인을 찾았다. 이 소설에 따르면 그들의 범죄 이력에는 격정적인 악마성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온갖 고난이 두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갔고, 그에 맞서면서 그들은 점차 괴물로 변해간 것이다. 소설에서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이종대가 총을 대하는 순간이다. 최인호는 이종대가 총을 처음 쥐는 순간 운명처럼 악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묘사했다. 타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힘-권력이 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종대는 희대의 악인이 된 것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거대한 힘의 유혹에 빠져들고 악과 조우하는지를 보여준 것이 소설 <지구인>의 공감대였다. 소설적 상상력을 제쳐두고서도, 이 사건은 여러 층위에서 한국 사회를 들쑤셔 놓았다. 사상 최대의 인원이 동원된 수사과정에서 300여건의 강·절도 용의자를 검거한 것이 부수적 성과였지만, 수사 중에도 유사한 총기강도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도 의외의 결과였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지목된 1973년 5월의 권총납치강도는 카빈소총강도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총기강도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권력의 도구로 보였던 총이 그 권력의 바깥에서 악의 형태로 쓰인다는 사실 역시 이 사건이 드러낸 시대적 진실 중 하나였다. <지구인>에 따르면, 총은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한 악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총이란 극단적인 폭력의 도구임은 분명하다. 그 점에서 이종대와 문도석을 옹호할 여지는 없다. 중요한 것은 총에는 악의 기운도 선한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강도가 악으로써 증명한 총의 절대성은 권력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재현된다. 악에서든, 권력에서든 총은 최종적인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총은 이 같은 억압의 상황과 메커니즘의 유력한 증거였을 뿐이다.


1970년대의 총기 사건은 최고의 권력형 스캔들인 ‘정인숙 살해사건’에서 시작해 자신의 움막을 불태운 철거반원 4명을 때려 죽인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에 이르기까지 유신시대의 저변을 반영했다. 사진은 가짜 총을 만들어 철거반원을 제압했던 범인 박흥숙이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0년대의 총기 사건은 최고의 권력형 스캔들인 ‘정인숙 살해사건’에서 시작해 자신의 움막을 불태운 철거반원 4명을 때려 죽인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에 이르기까지 유신시대의 저변을 반영했다. 사진은 가짜 총을 만들어 철거반원을 제압했던 범인 박흥숙이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총

살인만을 목적으로 한 극단적 경우를 배제한다면, 총은 다양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있다. 1977년 4명의 철거반원을 때려죽인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만든 총이 그러했다. 박흥숙에게도 총이 있었다. 그 총은 호신용으로 만든 딱총 수준의 것이라도 건장한 철거반원 일곱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무등산 타잔이니 이소룡 뺨치는 무술고수니 하는 것은 이후에 붙은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지은 무등산 자락의 움막에 철거반원이 불을 놓자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만큼 박흥숙은 삶을 내걸고 권총을 들어 극한의 분노를 표출했고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무허가 건물 철거가 취미라는 대통령의 광주방문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시행된 무등산 정화사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유신개헌으로 취임한 대통령에게 “국민총화를 위한 무궁한 지도력과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기원한 가난한 고시생 청년의 집을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 상황이 알려지면서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을 포함한 각계 인사들이 구명운동을 펼쳤다. 대통령의 영애도 구명운동을 지지했다고 알려졌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에게 총이 없었더라면 철거반원들도 그렇게 제압당하지 않고 정화사업도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총을 쥐는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 총은 살인의 증거가 되든 생존투쟁의 수단이 되든 극단적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건넜을 때처럼, 박흥숙은 자신이 만든 사제 권총에 운명을 넘겼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총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굴복시켰지만, 후자는 4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그 역시 총에 희생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박흥숙에게 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의 집이 무너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지 않는 이상 저항의 수단은 분노만큼이나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총이 아니었더라도 그의 분노를 누가 막을 수 있었을까. 총이 아닌 어떤 것이라도 그의 손에서는 총과 같은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혹여 그가 제압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분노가 변할 수 있었을까. 좌절과 분노를 강요받은 이에게 총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 외에는 주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비극의 근원이었다. 총으로 흥한 자 총으로 망한다는 진리가 박흥숙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슬픔이다.

1970년대 권력이 배반의 총성으로 마감되었지만 그 권력의 핵심은 건재함을 확인할 때 총과 권력의 조화는 더욱 끔찍해 보인다. 무등산 타잔의 총은 참으로 허망했지만, 지금 우리가 그것 말고 무엇을 쥐어야 할지를 아직 묻고 있는 듯하다.

<김성환 | 부산대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