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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에서 흘러내린 캔버스의 그물···회화를 해체하고 확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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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에서 흘러내린 캔버스의 그물···회화를 해체하고 확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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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희 ‘꾸띠아주, 누아주’ 전시 전경. 현대갤러리 제공

신성희 ‘꾸띠아주, 누아주’ 전시 전경. 현대갤러리 제공


“허상의 그림이 아닌 공간의 영역을 소유한 실상으로서 회화의 옷을 입고 빛 앞에 서자!”

신성희 작가(1948~2009)는 2005년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회화가 가진 평면성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신성희는 먼저 자신의 그림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잘린 색띠로 변해버린 그림들을 한쪽에 걸어놓고 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듯 엮었다. ‘누아주’(엮음 회화) 시리즈다.

신성희의 개인전 ‘꾸띠아주, 누아주’가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현대갤러리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붓 아래로 물감처럼 흘러내린 천 뭉치들을 볼 수 있다. 평면 캔버스를 자르고 엮어 입체적 회화로 나아갔던 그의 ‘누아주’ 작업이 설치 작품으로 진화한 순간이다. ‘공간의 영역을 소유한 실상으로서의 회화’라는 신성희의 말처럼, 붓에서 캔버스 천들이 그물처럼 공간을 형성하며 흘러내린다. 액션 페인팅과 유사한 기법으로 추상 회화를 그렸던 그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2009년 남긴 작품이다.

캔버스를 잘라 엮는 누아주 작업을 하는 신성희 작가의 모습. 현대갤러리 제공

캔버스를 잘라 엮는 누아주 작업을 하는 신성희 작가의 모습. 현대갤러리 제공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하는 작업을 추구했던 신성희의 40년 예술 세계를 둘러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꾸띠아주, 누아주’는 그의 초기작부터 말년작까지 총 32점을 선보인다. 파리에서 주로 활동했던 신성희는 채색한 캔버스를 일정한 크기의 띠로 재단하고 박음질로 이은 기법을 꾸띠아주, 캔버스 띠를 엮거나 묶는 기법을 누아주로 불렀다.

전시장 1층은 그가 프랑스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말년에 남겼던 누아주 작품들이 전시됐다. 2009년작 ‘공간별곡’은 너비가 3m에 가까운 대작으로, 캔버스를 엮어 만든 두 개의 누아주 회화가 겹쳐진 형태다. 서너 점의 평면 추상 회화가 해체됐다 다시 엮어져 다차원적인 공간과 이를 만드는데 걸린 시간성을 느끼게 한다.

신성희 개인전 전시 전경. 꾸띠아주 시리즈가 앞뒷면을 모두 볼 수 있게 천장에 매달린 채로 걸렸다. 갤러리현대 제공

신성희 개인전 전시 전경. 꾸띠아주 시리즈가 앞뒷면을 모두 볼 수 있게 천장에 매달린 채로 걸렸다. 갤러리현대 제공


신성희의 과감한 색으로 채색한 판지를 찢어 콜라주해 화면을 구성한 ‘콜라주’ 시리즈를 거쳐, 캔버스를 잘라 박음질로 이은 ‘꾸띠아주’, 캔버스를 잘라 엮은 ‘누아주’로 평면의 입체로 확장하는 실험을 이어간다.


지하 전시장에선 콜라주 시리즈와 꾸띠아주 시리즈를 볼 수 있다. 꾸띠아주 작품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천장에 매달려 작품의 앞뒷면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작가가 1980년 파리에 도착해 대성당의 스테인드클라스로 쏟아지는 빛에 매료된 순간을 표현했다.

신성희 ‘공심’ 3부작(1971) 벽지에 아크릴릭 갤러리현대 제공

신성희 ‘공심’ 3부작(1971) 벽지에 아크릴릭 갤러리현대 제공


이번 전시회에서는 신성희가 23세에 그린 ‘공심’(1971) 3부작이 처음 공개된다.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 특별상 수상작으로 작가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작품이다. 창문 밑에 누워있는 인물의 형상이 점차 사라지고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이다.

작가는 생전 프랑스 파리 개선문에 프랑스 삼색기를 모티프로 한 설치작업을 준비 중이었지만 2009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전시장에선 영상을 통해 파리 개선문에 삼색의 실로 엮어 만든 설치 작품의 시뮬레이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는 3월16일까지.


신성희 작가가 생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파리 개선문 프로젝트 프로토타입 이미지, 2009 갤러리현대 제공

신성희 작가가 생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파리 개선문 프로젝트 프로토타입 이미지, 2009 갤러리현대 제공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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