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 필요한데 결론 알려지면 시시해져
영화·시리즈 제작사들 “지구상 최대 난제”
감독 손편지에 ‘최장기 엠바고’까지 등장
넷플릭스 ‘오징어게임2’ 캐스팅 발표 영상. 유튜브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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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누군가 ‘하얼빈’은 역사가 스포일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연출자 입장에서는 영화적 요소가 더해진 스포일러가 담긴 영화입니다. 독립군 중 밀정이 누구인지, 밀정이 어떻게 밝혀지는지, 더불어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도 스포일러를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 18일 영화 ‘하얼빈’의 언론 및 배급 관계자 시사회장.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인쇄물 한 장씩을 받았다. 영화를 연출한 우민호 감독의 친필이 적힌 리플렛에는 ‘스포일러 주의’를 정중히 부탁하는 우 감독의 당부가 담겼다. 다음날인 19일에 진행된 주연 배우 현빈의 인터뷰에서도 영화의 핵심 반전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인터뷰 과정에서도 관련 질문을 하는 걸 자제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영화 ‘하얼빈’의 언론 및 배급 관계자 시사가 있었던 지난 18일 나눠준 우민호 감독의 친필이 인쇄된 리플렛. 이민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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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스포일러와의 전쟁’이다. 요즘 영화계에선 작품 홍보를 위해 감독은 물론, 배우들이 줄줄이 나와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혹시나 결론이 유출될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영화의 화제성은 높이되 영화의 후반부 내용이나 핵심 반전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화제성이 높아야 개봉 첫 주 영화를 본 관객들이 입소문을 내 다른 관객들을 불러모으는 선순환이 만들 수 있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스포일러가 될 순 없기에 맥락 없는 얘기만 반복할 수 밖에 없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호평 속에 최종화가 공개된 디즈니플러스의 ‘조명가게’는 지난 3일 제작보고회에서 김희원 감독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은 촬영 과정 중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제한적이고 모호한 말만 할 뿐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캐릭터 자체에 모두 사연이 있다보니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캐릭터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 작품의 원작자이자 각본을 쓴 강풀 작가는 원작 만화의 완결로 이미 결론이 공개됐는데도 “(총 8화중) 일단 4화까지만 풀게 되어서 대답을 시원하게 못한다”며 말을 삼켰다.
혜원 역의 배우 김선화도 캐릭터 소개를 부탁받았지만 “혜원은 빨간 구두를 신고 헤매는 여인이다. 강한 여인이다. 많은 얘기를 못해서 답답하다”고 언급했다. 원작처럼 시리즈에서도 혜원은 다른 등장인물들과 함께 탄 버스가 추락사고가 날 때 애인을 꽉 끌어안고 본인이 모든 충격을 받아내 즉사한 인물인데도 말이다.
또 지난달 26일 제작보고회가 열린 쿠팡플레이 ‘가족계획’에서 주연 배우 배두나 역시 질문에 답하며 “신선하고 새로운 주제로 만들다보니 스포일러 되는 부분이 있어서 많은 말씀을 못드리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쿠팡플레이는 현재 ‘가족계획’을 매주 한 편씩 공개하고 있다.
가장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스포일러를 차단하고 있는 곳은 넷플릭스다. 22억520만 시청시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작품인 오징어게임의 새 시즌이 제작비만 1000억원이 들고, 세간의 관심 역시 높다 보니 흥행은 물론, 스포일러 차단에도 필사적이다. 이에 넷플릭스가 꺼낸 카드는 ‘최장기 엠바고(보도 유예)’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작품 공개일 보다 1년 앞선 지난해 12월 국내 취재진을 오징어게임2의 세트장에 초청하면서 엠바고를 요청했다. 바로 다음해인 올해 11월로 엠바고를 설정한 것. 감독 및 출연진과 함께 하는 제작발표회 역시 8월에 했지만, 실제 보도는 이번 달에 이뤄졌다. 엠바고가 각각 1년과 3개월로 역대 최대로 길었던 셈이다.
8월 간담회에서 김지연 대표는 “미리 알면 재미가 떨어지니까 모르는 상태로 많은 분들이 봤으면 하는 거다. 사실 그 이유 외에 (보안에)다른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9월 ‘오징어게임’ 에미상 수상 기념 간담회에서 황동혁 감독도 “시즌2 게임이 다 정해져있다. 하지만 공개는 절대 안 된다. 어떤 게임이 나오는지가 극중 가장 큰 재미 요소 중 하나”라며 “어디서 들어도 절대 극비로 해달라”라고 강조했다.
조명가게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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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캐스팅도 스포일러를 단속했다. 넷플릭스는 출연 배우 측에 공식 발표 전까지 관련 사항을 말하면 안 된다는 조항을 내걸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지난해 출연자 캐스팅 기사가 나올 때마다 넷플릭스와 각 배우의 소속사는 “확인 불가”로 대응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촬영에 돌입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본 유출을 막기 위해 인쇄나 메일 발송이 되지 않는, 모니터상으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대본을 활용했다. 또 배우가 탈락한 이후에는 대본을 공유하지 않아 끝까지 ‘생존’한 몇몇 배우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이 작품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출연진 중 한 명인 배우 양동근은 최근 한 방송에 나와 오겜2 촬영장에 대해 “보안이 철저하다. 매 촬영 때마다 비밀유지 서약서에 매일 서명한다. 휴대폰 카메라에도 보안 카메라를 붙였다. 굉장히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을 한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철저하게 관리되는 스포일러가 유출되면 그 대가는 가혹하다. 제작진은 물론 출연진까지도 결론을 발설했다가는 강력한 조치가 취해진다. 실제로 넷플릭스 예능 ‘더 인플루언서’에 출연해 우승한 유튜버 오킹은 자신이 우승자가 된다는 사실을 ‘스포일’하면서 우승 상금 3억원을 받지 못했다. 오킹은 상금만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뢰도 잃었다.
넷플릭스 측은 “비밀 유지는 작품의 성공을 바라는 모든 제작진과 출연진 간의 약속”이라며 “프로그램의 신뢰도와 출연자 간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출연 계약 상의 비밀 유지 의무를 저버린 우승자에게는 상금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넷플릭스를 비롯한 각 OTT들이 필사적으로 스포일러를 관리하는 것은 OTT의 오리지널 시리즈들의 시청자들이 상호 배타적 특성을 갖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소비자들이 여러 OTT 플랫폼을 동시에 구독하는데 비용적인 부담을 느끼는 만큼 최근엔 보고 싶은 콘텐츠 하나를 골라 그 플랫폼 하나만 결제하는 추세가 생겼다.
따라서 콘텐츠들은 초반 화제성을 끌어올려 시청자를 모으고, 궁금증을 갖고 계속 시청을 해야 흥행할 수 있기에 개봉 및 공개 전부터 활발한 홍보활동에 나서지만 줄거리와 핵심 반전은 지켜야 하는 고민을 맞닥뜨린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작품 공개 전에 관련 내용을 비밀로 유지하는 것은 창작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노고와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작품이 의도한 재미를 시청자에게 오롯이 전달하기 위해 중요한 장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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