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경제가 그렇게 좋아졌냐고요? 아니, 그 반대입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이고, 연간 물가 상승률은 200%가 넘으며, 빈곤율은 치솟았죠.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는 국민들 한탄이 터져 나오는데요. 그런데 주식시장엔 왜 투자자가 몰릴까요.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유례없는 ‘자유주의 경제 실험’이 어쩌면 성공할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죠. 오늘은 아르헨티나의 경제 대전환 실험과 그 혼란을 들여다보겠습니다.
9월 23일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개장 종을 울린 뒤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하원 의석의 15%밖에 얻지 못한 제3정당의 대선 후보였지만,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심판론을 발판으로 지난해 12월 집권에 성공했다.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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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이의 거침없는 톱질
지난해 대선 유세 중 전기톱 퍼포먼스로 돌풍을 일으켰던 아르헨티나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를 기억하시나요. 살인적인 물가에 지친 유권자들은 “썩은 병폐를 도려내겠다”는 아웃사이더 경제학자에 열광했죠. 56% 득표율로 당선된 그가 지난해 12월 취임한 뒤 10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무정부 자본주의자’ 밀레이의 전기톱은 쉼 없이 돌아갔죠. 그가 한 일이 너무 많지만 몇 가지만 꼽자면.
-공무원을 대거 자르고 있습니다.
이미 3만1000명의 공공행정기관·국영기업 직원이 해고됐고, 더 자르고 있습니다. 올해 총 7만명 해고를 예고한 상황입니다.
-에너지, 교통 보조금을 대폭 삭감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요금은 5월 125페소(약 172원)에서 574페소로, 8월엔 다시 757페소(약 1044원)로 올랐습니다. 버스·수도·가스·전기요금이 모두 뛰었습니다. 휘발유 가격은 지난해 12월 이후 150% 올랐죠.
-공공 건설사업을 대부분 중단했습니다.
가장 톱질을 크게 당한 건 공공 공사입니다. 기존 진행되던 공공 인프라 건설 사업의 87%(예산 기준)를 중단했죠. 이 나라 고용을 떠받쳐온 건설산업은 휘청거립니다.
9월 11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밀레이 대통령의 연금 인상 거부권 행사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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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 연금을 동결했습니다.
다락같이 물가가 뛰는데도 700만 은퇴자가 받는 연금은 제자리입니다. 지난달 국회가 8% 인상안을 통과시켰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죠. 동결은 실질적으론 대규모 삭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연금 구매력은 아르헨티나식 표현으론 ‘액화’, 즉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공립대학은 학비가 무료인 거 아셨나요. 야당은 물가 상승을 이유로 공립대학 재정지원을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요. 얼마 전 밀레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포퓰리즘적이고 선동적”이라면서요.
-통화가치를 50% 평가절하했습니다.
밀레이 취임 전 아르헨티나 외환시장은 심하게 왜곡돼 있었습니다. 암시장에선 1달러에 1000페소가 넘는데, 공식 환율을 400페소로 묶어놨던 거죠. 밀레이는 취임 직후 이를 1달러=800페소로 조정합니다. 단번엔 페소 가치가 반토막 났습니다.
재정적자가 사라졌다
아르헨티나 언론은 밀레이 정책을 ‘전기톱과 믹서기’ 라고 부릅니다. 방만한 조직과 인원은 팍팍 잘라 없애버리고(전기톱), 급여와 재정지원은 동결해서 인플레이션이 그 가치를 분쇄하게 만들죠(믹서기). 정책의 목표는 뚜렷합니다. ‘적자 제로’입니다.
밀레이 대통령은 “이 모든 악의 근원이 재정적자”라고 규정합니다. 집권하자마자 ‘적자 제로’를 선언한 이유이죠. 그는 “점진주의가 아닌 충격 요법을 선택했다”고도 밝혔는데요.
자, 그럼 무지막지한 충격 요법은 통했을까요. 숫자로는 그렇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올해 1월 12년 만에 처음으로 월별 ‘재정 흑자’를 달성했는데요. 재정 흑자는 지난달까지 9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단기간에 급격한 변화를 이룰지는 예상치 못했는데요.
10월 2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립대학 재정 지원 확대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밀레이 대통령을 풍자한 팻말을 들고 있다. 학비가 무료인 공립대학에 대해 아르헨티나인들은 큰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밀레이가 재정지원 확대를 거부한 것에 대한 반감도 크다.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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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어마어마하게 자르고 갈아버렸단 뜻이죠. 1~9월 정부의 누적 지출액은 지난해보다 27.7%나 줄었습니다(물가상승률 반영한 실질 지출 기준). 같은 기간 경기침체로 세수가 6%나 줄었는데도, 재정 흑자가 쌓이고 있는 이유이죠.
물론 써야 할 돈 안 쓴 게 제대로 된 흑자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마치 전기, 가스, 수도 요금, 월세를 내지 않고 흑자라고 주장하는 가계나 마찬가지”라는 비판(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인데요.
금융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달 밀레이 대통령이 2025년에도 ‘적자 제로’를 이루겠다는 야심 찬 예산안을 발표하자, 달러 표시 채권가격이 뛰며 시장이 환호했습니다. 2년 연속 재정 흑자는 아르헨티나에선 2008년 이후 없었던 일. 밀레이는 2025년 예산안이 “나라의 역사를 바꿀 것”이라고 큰소리칩니다.
쇠고기도 못 사 먹게 된 중산층
아르헨티나의 월별 물가상승률 추이. 8월엔 4.2%였고 9월엔 3%대로 더 낮아질 전망이다. 지난해 12월엔 물가상승률이 월 25.5%로 치솟았는데, 밀레이 대통령의 페소화 평가절하 충격이 컸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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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공공의 적 1호’였던 물가도 조금씩 잡혀갑니다. 8월 이 나라 물가상승률은 월 4.2%(연 4.2%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경악할 수치이지만, 지난해 12월 물가상승률이 25.5%까지 치솟았던 아르헨티나로선 엄청나게 낮아진 겁니다. 이제 연간 인플레이션은 236.7%를 기록 중이죠. 경제학자들은 올해 말이면 연간 물가상승률이 122.9%까지 떨어질 걸로 내다봅니다.
올해 상반기 아르헨티나 빈곤율(중위 소득의 50% 이하 비율)은 무려 53%. 지난해 말보다 11%포인트나 높아졌고, 20년 만에 최고입니다. 너무 급격히 높아져서 이게 맞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인데요.
아르헨티나는 예전엔 ‘중산층 국가’라는 자부심이 꽤 컸던 나라죠. 라틴아메리카에선 드물게 소득분배가 균등한 편이었기 때문인데요. 한때 중산층이었지만 이젠 일자리를 잃거나 실질 급여가 삭감된 이들은 당장 먹고살 게 걱정입니다. 손에 쥐는 돈은 줄었는데, 버스요금부터 연료비까지 물가가 죄다 뛰었으니까요. 71세 은퇴자 알리시아 라미레스는 언론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 우린 아파트를 살 수 있었고 딸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켰지만, 지금은 연금으로 관리비와 약값을 대기에도 부족해요.”
8월 6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통근자들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가 보조금을 줄이면서 지하철 요금은 올해 들어 500% 넘게 치솟았다.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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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쇠고기 천국이던 이 나라에서 쇠고기 소비량(1인당 연 44.8㎏)이 지난 100년 중 최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역사적 평균은 72.9㎏). 천하의 아르헨티나인이 쇠고기가 비싸서 사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겁니다(대신 닭고기 소비가 증가).
의류·연료는 물론 식품·의약품 같은 필수품까지, 거의 모든 소비가 급감했습니다. 특히 주류와 화장품 판매는 1년 새 20%, 가전제품은 30% 넘게 쪼그라들었죠. 컨설팅 회사 센티아는 올해 전체 소비가 10% 넘게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는데요. “과거 최악이었던 2001년 위기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센티아의 오스발도 델 리오 이사)입니다.
건설업과 제조업 등 산업생산 역시 침체에서 벗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내다본 올해 아르헨티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7%. 10년 만에 여섯 번째 경기침체를 맞이합니다.
행복한 증시와 가라앉는 지지율
아이러니는 경기가 극심한 침체의 늪에 빠진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증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젖어있단 점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래소의 주요 21개 종목을 담은 메르발(MERVAL) 지수는 올해에만 84.28% 올랐고요. 아르헨티나 관련 지수를 추종하는 상품인 글로벌X MSCI 아르헨티나 ETF(티커 ARGT)의 올해 수익률은 31%에 달하죠.
올해 아르헨티나 메르발 지수(파란선)와 미국 S&P500(검은선)의 추이 비교. 메르발 지수의 올해 상승률은 84.28%, S&P500는 20.1%이다. 블룸버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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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은행주는 훨훨 날고 있습니다. 뉴욕증시에 상장된 방코 갈리시아(Banco Galicia), 방코 매크로(Banco Macro) 같은 주요 금융주 ADR의 올해 수익률은 각각 156%, 184%나 되는데요.
왜 은행주일까요. 자고로 경제가 살아나서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 그 나라 은행은 자연히 대출이 늘고 실적이 좋아지는 법이잖아요. 특히 그동안 아르헨티나는 너무 금리가 높아서 은행 대출 받으려는 수요가 없었는데요. 이제 물가상승률이 구조적으로 낮아지면서 기준금리가 내려가는 추세죠(2023년 12월 100%→2024년 5월 40%). 아직은 너무 초입이긴 하지만 ‘거시경제의 시나리오가 달라지고 있다’고 보는 국내외 투자자들이 은행주에 베팅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페소화 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생겼다면 외국인 투자자가 이 나라 증시에 얼씬도 안 할 텐데요. ‘적자 제로’ 정책이 그런 리스크를 줄였다고 보는 겁니다. 즉, 지금 당장은 아르헨티나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지만, 그 뒤엔 V자형 경제회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보는 낙관론이 금융시장에 퍼져있죠.
이는 곧 밀레이 대통령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는 지금 236%인 연간 물가상승률이 내년 말엔 18.3%까지 둔화할 거라고 예측합니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5%로 전망하고요. 그의 말대로 된다면 정말 전 세계가 찬탄할 만한 기적적인 턴어라운드라 할 수 있겠습니다.
8월 7일 실직자의 수호자로 알려진 성 카제탄 축일을 맞아 수프 국자와 빈 냄비를 든 사람들이 산 카예타노 교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까지 행진 중이다. 팻말엔 스페인어로 “그들은 자유의 이름으로 우리를 굶겨 죽인다”라고 적혀 있다.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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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경로가 썩 순탄해 보이진 않습니다. 국민의 참을성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지난달 밀레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46.4%. 한 달 만에 4.2%포인트나 빠졌습니다. 갈수록 밀레이에 대한 긍정 평가는 줄고, 부정적인 점점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공무원과 국영기업 노조, 은퇴자, 대학생, 조종사 등등. 긴축재정 직격탄을 맞은 이들의 총파업과 항의 시위로 나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힘들어도 이 기회에 포퓰리즘은 끝내야지’라며 가혹한 정책을 수용했던 국민들도 갈수록 먹고 살기 퍽퍽해지니 ‘이거 진짜 좋아지긴 하는 건가?’ 의문을 갖습니다. 밀레이 지지자라는 건설사 대표 후안 파블로 루도니는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터널 끝에 빛이 보여야 합니다. 문제는 그 빛이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거 같다는 거죠.”
하원 의석이라곤 15%밖에 없는 제3 정당 소속의 밀레이 대통령. 정치적 기반이 약한 그가 그동안 전기톱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실 국민의 지지였죠. 그게 무너진다면 그의 톱날은 지금 같은 날카로움을 유지하긴 어려울 텐데요. ‘인플레이션을 무너뜨리겠다’고 공언해 온 밀레이의 지지율이 설마 물가보다 더 빨리 무너지는 건 아니겠죠. 경기가 바닥 쳤다는 신호가 얼른 나와주지 않으면 자칫 위험할지 모릅니다. 역시 개혁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By.딥다이브
아르헨티나 관련 외신 사진을 찾아보니 절반은 축구, 나머지 절반은 시위 사진입니다. 이 혼란의 끝엔 과연 해피엔딩이 있을까요. 그러길 바라지만 아직은 많은 것이 불확실해 보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밀레이 대통령 취임 10달. 공무원을 자르고, 보조금을 삭감하고, 공공사업을 멈추고, 연금과 대학 재정을 동결하는 ‘전기톱과 믹서기’ 정책이 대대적으로 시행 중입니다. 이를 통해 아르헨티나는 드디어 ‘재정 흑자’를 달성했습니다. 인플레이션도 조금씩 잡혀갑니다.
-적자 제로가 가능한 건 국민의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주머니는 비었고 삶은 전보다 훨씬 나빠졌습니다. 빈곤율은 53%까지 치솟았죠.
-밀레이 개혁의 승리를 기대하는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증시는 활황입니다. 당장은 고통스럽고 경기침체에 빠져도 조만간 V자 반등이 찾아올 거란 기대인데요. 관건은 국민들이 얼마나 더 참을성을 발휘해 주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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