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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화)

‘나의 해리에게’ 신혜선, ‘안달’ 주은호 싫어 ‘근자감’ 주혜리를? [김재동의 나무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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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재동 객원기자] 예쁜 것은 구르는대로 꽃잎만 묻고 못난 것은 구르는대로 재만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예쁜 것임에도 구르는대로 재만 묻히고 못난 것임에도 구르는대로 꽃만 묻히는 경우인들 없을까?

23일 ENA를 통해 첫 방송된 지니TV 새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한가람 극본, 정지현·허석원 연출)에서 1인 2역을 맡은 신혜선의 캐릭터 주은호와 주혜리가 그런 경우다.

첫회부터 드라마를 연 주은호는 PPS 아나운서다. 방송국이 9시 메인 앵커로 미는 그 잘난 정현오(이진욱 분)의 전 여자친구다. 정현오와 끝난 후엔 연하의 후배 아나운서 문지온(강상준 분)의 대시를 받을 정도니 충분히 예쁜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 주은호는 아나운서국 팀장 김신중(전배수 분)의 애물단지다. 방송국 14년 차에 차장도 못달았다. 새벽 5시 아침 라디오 청취율 1위가 유일한 자랑거리다. 그런 주제에 아침형 인간임을 강조하며 오후 방송은 기를 쓰고 고사하는 고집불통이기도 하다.

어느 PD도 찾는 이 없다. 오죽하면 등장인물 소개란에도 존재감 제로로 묘사된 존재다. 주은호가 고사한 오후 프로그램조차 김신중이 돈수백배해 따낸 자리였다. 그러니 김신중 눈에 주은호 떠난 자리가 잿물범벅으로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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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존재감은 제로지만 끊임없이 관심은 고프다. 그런 주은호다 보니 입사 14년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녹화 분량 14분’이란 미끼는 먹고 죽더라도 물지 않을 수 없다. 문지온과 약속한 데이트 따윈 안중에도 없다. 쥐꼬리 출장비에 1박 2일? 그야말로 눈에도 안들어오는 추신일 뿐이다.

주은호를 오매불망하는 문지온이 데이트 대신 그 출장에 동행했다. 결과적으로 바닷물에 푹 절여진 출장을 마치고 귀가하는 자리. 주은호는 정현오에 대한 제 마음을 문지온에게 전한다.

“나는 현오가 싫어.” “아직도? 왜 싫은데?” 문지온이 물어왔을 때 플래시백 속의 정현오가 말한다. “결혼이라니? 은호야. 안해! 나 그딴 거 안한다고!” 그랬다. 주은호는 정현오에게 프로포즈를 거절당했다. 그렇게 8년의 사귐은 끝났었다.

주은호가 문지온에게 답한다. “가질 수 없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간절해도 절대로 가질 수 없으니까. 너무 갖고 싶은 걸 포기하려면 그걸 얼마나 죽도록 미워해야 하는 지 알아? 그래서 난 현오가 싫어. 끔찍하게 싫어.” 그렇게 문지온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밝힌 후 “미안해!” 사과한다.

그 대목에서 주은호 집 앞의 가로등이며 조명들이 깜빡깜빡한다. 그리고 문지온이 그 정도 이유로는 떨어져 나가지 않겠다며 키스해 온 순간 가로등이 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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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디어N서울의 주차관리소에서 주혜리가 깨어난다. 이 주혜리는 제 입으로 살아온 기억의 대부분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여자다. 앞머리는 커튼처럼 흘러 삽살개처럼 눈을 덮어 답답하다. 나무늘보처럼 하루에 무려 16시간을 잔다. 말투조차 느리고 나른하다. 웬만해선 있는 줄도 모르는 희미한 존재감은 덤이다. 그러니 잘났냐 못났냐를 따지자면 못난 축에 속한다.

그런, 매일이 지겨워 죽겠는 여자 주혜리가 생기를 찾았다. 정신과 의사조차 재밌는 일 중 하나라고 소개한 그 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미디어N서울 8시 뉴스 앵커 강주연(강훈 분)이 대상이다.

주혜리에게 강주연은 좋은 사람, 멋진 사람, 불친절한 사람이다. 주혜리가 읽은 웹소설은 말했다. 불친절한 남자가 자기 여자에겐 아주 지극정성이라고.

주혜리는 자신이 근무하는 관리소 맞은 편 자리를 강주연을 위해 항상 맡아놓는다. 그렇게 소심하게 짝사랑을 키워가며 마음의 준비를 끝내가던 차에 그 일이 터졌다. 강주연이 보도한 양파파동 보도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습격.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강주연을 피신시킨 주혜리는 “거기서 그렇게 달려들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다친 데는 없죠?”라며 자신을 걱정하는 강주연의 입술을 기습적으로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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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깻짓이 절로 날만큼 흥이 난 그 밤 귀가 길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 꿈 속의 남자 정현오. 그가 자신을 “주은호!”라 불렀다. 꿈 속의 남자가 꿈 속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준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상담하던 중에 정신과 의사조차 자신을 은호라 부른다.

“선생님, 제가 은호씨인가요?” 되물었을 때 “네 은호씨, 두달전에 상담을 받기 시작한 은호씨.” 이게 뭔 일? “선생님 전 혜리인데요.”

드라마는 주은호의 해리성정체장애를 테마 삼았다. 등장인물 소개란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동생이 실종되고, 설상가상 8년 만난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불안함을 느끼던 중 자신 안의 낯선 인격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주은호를 설명한다.

주은호가 한사코 오후 방송을 고사한 이유, 주혜리가 하루 16시간 잔다고 믿는 이유가 설명된다. 주은호는 새벽 4시에 하루를 시작하고 주혜리는 오후시간을 주차관리소에서 보낸다. 주은호의 집에서 문지온이 키스해 올 때 가로등이 깜빡거리다 꺼진 것은 정체성 혼란을 상징하는 영리한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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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절 주은호는 현오의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했다. “현오야, 나 물에 빠지면 구해줄 거야?” “현오야, 나야? 아홉시 뉴스야?” “현오야, 나야? 청소기야?” 자신만만한 커리어우먼을 가장했지만 사랑 앞에서 끊임없이 왜소해진 것이 주은호의 본색였던 모양이다. 그게 힘들어 도망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프로포즈를 거절 당한 것은 충격이면서도 안도일 수 있다.

그에 반해 주혜리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나는 살아온 기억의 대부분을 잃었잖아. 그래서 실패에 대한 빅데이터가 없어. 그래서 자신감이 넘친달까?” 그런 탓이지 주은호가 문지온에게 키스를 당할 때 주혜리는 강주연의 입술을 훔치고 흥에 겨운 어깨춤을 추었다.

그런 주은호와 주혜리지만 공통점도 있다. “모두에게 친절한 남자는 안좋아해. 모두에게 불친절하고 나에게만 친절한 남자가 좋아.” 주은호가 사랑한 정현오는 친절한 남자여서 불안을 불렀고 주혜리가 만난 강주연은 불친절한 남자여서 안도감을 주었는 지도 모른다.

“내가 등신같이 살아서..”란 속내를 품고사는 주은호로선 “나는 예쁘잖아”란 자의식 과잉의 주혜리 삶을 갈구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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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회만에 주은호와 주혜리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신혜선의 연기는 칭찬할만 하다. “여보세요” “저기요”로 시작하는 따따부따 화법은 듣는 이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며 불안을 감춘 주은호의 내면을 드러냈고, 끝을 늘이는 말투와 남들 신경 안쓰는 안하무인 4차원 행동은 주혜리의 에고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궁금증도 많다. 오후 4시 편성 프로그램을 주은호를 위해 오전으로 바꿀 수 있는 정현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 정현오는 왜 끊임없이 신경 쓰면서도 주은호와 결혼은 할 수 없는 건지. 군인을 꿈꾸던 강주연은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는 지. 원래 아나운서로 이해되는 그 형 세연은 어떻게 됐는 지. 결정적으로 미디어N서울 주차관리소 주혜리야 말로 주은호의 잃어버렸다는 동생의 보직은 아녔는 지 등.

막 시작한 ‘나의 해리에게’. 접근성이 탁월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지켜볼 매력이 충분해서 앞으로가 기대되는 드라마다.

/zaitung@osen.co.kr

[사진] 방송사 제공,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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