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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IN PRESS] 30살에 방출되고 41살에 전설로 은퇴할 때까지...이동국이 전한 '선택의 이야기'(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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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풋볼=신동훈 기자(서대문)] K리그와 전북 현대,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인 이동국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동국은 27일 서대문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결과를 아는 선택은 없다』의 출간기념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 이동국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최연소 출전을 기록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며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실력으로 K리그 흥행을 이끌었다. 2002 한일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에선 아쉽게 탈락을 하면서 고배를 마셨지만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가면서 월드컵 꿈을 이뤘다. 미들즈브러에서 뛰며 프리미어리그를 경험하기도 했다.

미들즈브러에서 돌아온 후 성남FC에 있던 이동국은 나이를 이유로 방출을 당했다. 전북 현대로 간 이동국은 K리그 전설을 썼다. 늦은 나이에 전북으로 갔는데 무려 12시즌을 뛰면서 수많은 트로피를 들었다.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남게 됐고 전북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No.1 레전드로 불린다. 2020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때 이동국이 달았던 20번은 영구결번으로 남게 됐다.

출판기념회에 작가로 나선 이동국은 선수 생활을 돌아보고 포인트가 되는 사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했다. 은퇴 이후에 삶도 말을 하면서 축구선수 이동국이 아닌 인간 이동국 제2의 삶을 언급했다.

[이동국 출판기념회 기자회견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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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때 이미 한번 책을 냈는데, 은퇴 후에 다시 책을 냈다.

13년도에 처음 책을 냈다. 그때는 이런 행사를 하지 않았다. 은퇴를 준비하면서 책을 냈었는데 이후로 7년을 더 뛰었다. 그 7년 동안의 이야기, 또 은퇴 이후 이야기도 전하고 싶었다.

-축구와 관련된 사진이 제목, 표지에 보이지 않는다.

처음 책을 냈을 때 이동국 책인 거 같이 만들었다. 이번엔 색다르게 에세이이긴 하지만 누구든지 부담 없이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제목 선택도 자서전이나 에세이는 가르치려는 느낌이 있는데 이 책은 다시 한번 생각을 하는 느낌을 가졌으면 했다. 디자인이 예쁜데 이동국이 썼네 느낌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막내 (이)시안이 나이 때(4학년) 축구를 시작했다.

확실한 건 (이)시안이는 4학년의 나보다 더 잘한다. 공 리프팅도 못하던 나였는데 시안이는 더 많이 찬다. 어릴 때 공을 가지고 논 게 도움이 되는 듯하다. 지금 축구선수로서 꿈을 가지고 하고 있다. 시안이가 축구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성공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유전자가 좋아서' 이런 말이 붙을 것이다. 본인의 노력이 묻히고 '아버지가 이동국이니까' 이런 게 붙을까봐 걱정이 됐다.

차두리가 은퇴를 할 때 "차범근의 아들로 살아가는 게 힘들었다"고 했었다. 그런 느낌 때문에 축구를 안 하길 원했는데 시안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도우려고 한다. 축구를 하면서 생각하는 꿈과 길을 응원하려고 한다.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대학 진학 대신 프로 직행을 선택한 게 최초의 선택인데.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프로로 가는 게 당연하다. 내가 뛸 때만 해도 프로 직행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느낌이었다. 난 연고전에 뛰는 게 꿈이었다. 당시 스승님께서 그 말을 듣고 혼을 내시며 "축구선수로서의 성공을 하기 위해선 프로로 가 먼저 사회생활을 경험하라"고 하셨다.

20살에, 포항에 입단했다. 나보다 15살 많은 형들이 있었다. 프로에서 뛰며 나도 모르게 성장했다는 느낌이 있었다. 프로에서 적응을 하고 운도 따랐다. 황선홍 선배의 빈자리를 내가 메웠다. 내게 주어진 시간에 좋은 결과를 냈다. 차범근 감독님이 최종 엔트리에 넣었다. 신문을 통해 엔트리를 확인하던 시대였는데 아침에 전화가 불이 나게 와서 신문을 봤다. 내가 월드컵에 최종 엔트리에 들었다. 깜짝 놀랐다. 그 이후로 프랑스 월드컵을 가면서 축구선수로서 많은 걸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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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월드컵 네덜란드전 영상을 보면 캐스터 분이 김동국이라고 하더라. 그만큼 무명이었다.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선수였다. 공항에 나갈 때 배웅하러 팬들이 오셨는데 포항 골수 팬들 3명만 내게 응원했다.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그 팬들이 와 잘 갔다오라고 하셨다. 갔다가 왔는데 인생이 바뀌었다. 프랑스에서 갈 때와 왔을 때, 삶이 180도가 달라졌다. 차범근 감독님이 중도에 경질이 됐고 한국 분위기를 몰랐다. 형들이 "계란을 맞아도 네가 맞아야 되지 않겠냐"라고 하며 기수를 들고 먼저 공항에 나가보라고 했다. 팬들이 3000명 정도 있었는데 환영을 해줬다. 김포공항 출국문이 열리는 순간, 내 축구인생도 새로운 세계로 갔다.

-프랑스 월드컵 이후 이동국 혹사의 시기를 보냈다.

청소년, 올림픽, 성인 대표팀을 오갔다. 무릎 상태가 안 좋았는데도 선수로서 뛰고 싶다는 생각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면서 경기를 했다. 책을 쓰면서 돌아가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라고 생각해봤는데 똑 같이 했을 것 같다. 참고 뛰는 게 선수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소속팀에는 죄송하지만 대표팀을 돌아다녔다.

당시는 K리그 일정 조정이 없었다. 대표팀을 뛰면서 소속팀에 많은 기여를 하지 못한 건 아쉬웠다. 2002년 월드컵을 향해 달려갔다. 조력자가 있었으면 절제를 하고 그랬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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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에 가지 못했다. 상무에 입대했는데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하던데.

한일 월드컵에 당연히 갈 거라고 봤다. 아시안게임 탈락으로 상무에 갔다. 바닥이라고 느꼈을 때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능력에 비해 과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군대 입대를 선택했다. 들어가서 다른 타 스포츠 선수들이 4년에 1번 있는 올림픽에서 열심히 하는 걸 보고 내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과 어울리면서 2006 월드컵을 준비했다.

패자로 입대를 했다가 제대를 할 때는 대표팀 1순위 스트라이커로 나왔다. 80분 정도 뛰면 상대는 지치는데 나는 힘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내가 가진 거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체력이 완벽해졌다. 90분이 다 됐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준비가 됐으니 가능했다.

-월드컵 2개월을 앞두고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다.

월드컵 두 달을 남기고 경기를 했는데 1-0으로 이기고 있었다. 롱패스가 나왔고 전력질주를 했다. 공을 잡기 위해 방향을 틀다가 십자인대 부상을 입었다. 신혼여행에서도 운동을 할 정도로 월드컵을 준비했는데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병원을 갔는데, 의사 3명이서 월드컵을 갈 수 있는지 확실하게 이야기를 안 했다.

독일로 진단을 받으러 갔다. 진료 후에도 30분간 말을 돌렸다. 2006 월드컵엔 너의 자리는 없을 거라고 했다.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2002 월드컵 탈락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결과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재활로 4년 동안 준비한 걸 2개월에 재활로 하면 출전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스스로 그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느꼈다. 2002 한일 월드컵은 단 1경기도 보지 않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은 응원했다.

-프리미어리그 진출 후 이야기를 한다면.

한국에서 영국으로 가는 첫 번째 케이스였다. 십자인대 복귀 후 2경기 교체를 뛰고 영국으로 갔다. 경기 감각은 부족했으나 좀처럼 올 수 없는 기회이니 진출 선택을 했다. 1시즌 반 뛰며 축구선수로 삶은 실패했지만 그 속에서 많은 걸 얻었다. 가족이나 생겼고 직업이 축구선수이지 축구가 내 인생 전부는 아니라고 느꼈다. 사소한 일상생활에 행복을 느꼈다.

-성남FC 복귀 후 30살 나이를 이유로 방출 통보를 받았다.

성남에서 6개월 있었다. 김학범 감독님이 나가고 신태용 감독님이 오셨다. 베테랑 선수들을 정리한다고 말하셨는데 그때 하와이 여행에서 방출 통보를 들었다. 계약이 있는데 나가라고 하니 좌절감을 느꼈다. 나이가 문제라고 하니 당당하게 다시 한번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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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감독 설득으로 전북으로 갔다.

전북이랑 다른 한 팀이 제안했다. 다른 팀 조건이 더 좋았다. 연봉도 전북보다 2배였다. 그 곳으로 가기로 했는데 최강희 감독님이 면담을 요청하셨다. 내게 "네가 꼭 필요하다. 네 능력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감독이 나다. 의심을 하겠지만 내가 도와주겠다. 손 들고 날 빼달라고 할 때까지 널 기용하겠다"고 하셨다.

엄청난 신뢰에 전북으로 마음을 돌렸다. 부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지훈련에서 무득점을 하고 돌아왔는데 감독님은 날 믿었다. 진정한 리더는 사람을 믿어주고 따라가게 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후 전북에서 12년 있었고 트로피를 연이어 들었다.

-전북 왕조를 이끌었다.

당시 전북은 선수들끼리 잘 어울렸다. 난 베테랑으로서 새로 들어온 선수들 적응을 돕는 역할을 했다. 경기를 못 뛰는 선수들도 챙겼다. "감독님이 널 데리고 온 건 쓰려고 그런 것이다"라고 위로를 했다. 그러면서 선발, 벤치 할 것 없이 불만이 없었고 더 강해졌다. 그야말로 원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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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살에 다시 국가대표가 됐다. 월드컵 예선에만 뛰라고 요청을 받았는데.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2경기를 앞두고 신태용 감독님이 전화가 와서 베테랑 선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본선에 가도 데리고 갈지는 모르겠다고 하셨다.

성남에 있을 때 30살에 베테랑이라고 내치더니, 38살에 다시 내가 필요하다고 하다니 참 이상했다. 그래도 월드컵 본선행을 이끌고 싶었고 감독님 요청을 수락했다. 기쁜 마음으로 명단에 들어갔다. 이란전 종료 2분 전을 앞두고 날 부르더라. 교체 대기 중일 때 관중석에서 웅성대면서 날 응원했다. 들어가는 순간, 그때의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팬들이 박수를 쳐주고 내 이름을 연호했다. A매치 100경기를 뛰었어도 그 2분은 잊을 수 없다. 그 2분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고 느꼈다. 이란전 이후 우즈베키스탄전이 끝나고 월드컵 본선으로 갔다. 그 이후로 국가대표로 갈 수 없었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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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41세에 은퇴를 했다. 더 뛸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은퇴를 했는지.

김상식 감독이 그 다음 해에 내정이 됐다. 1년 더 하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하지만 내려놓기로 했다. 김상식 감독과 어렸을 때 같이 했고 감독으로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았다(웃음). 사실 정신적으로 내려 놓아야 한다고 느꼈다. 조급함을 느꼈고 2020년 20번을 단 이동국이 은퇴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였다.

언제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더 할 수는 있었지만 내려놓는 게 가장 맞다고 느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은퇴가 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경쟁도 하기 싫었다. 무얼 잘할 수 있는지 3년 동안 경험했다. 해설, 방송 등 안 해본 것들을 했다. 축구 외 생활을 하면서 사회 경험을 했다. 사기도 한 2번 당했다. 지금도 배워가는 시기다.

-차범근 감독님이 추천사를 써주셨다.

추천사를 한 명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최강희 감독님이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셨는데 월드컵 대표를 시켜주신 차범근 감독님이 생각났다. 많은 반대에도 책임을 지고 날 데리고 오신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차범근상을 타게 된 인연도 있었다. 추천사를 부탁드리니 흔쾌히 해주셨다.

-전북에 있을 당시 모든 기준점이 '동국이 형'이었다. 생활부터 심지어 차까지 이동국에게 맞췄다. 본인도 리더를 맡았고 그 역할을 알고 있을 텐데.

리더는 시키는 것보다 먼저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리더였다. 선수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차 같은 경우는 당연히 전북 선수면 현대차를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몸으로 실천하는 게 진정한 리더라고 본다.

-은퇴 후 3년간 다른 인생을 찾는 중이라고 하셨는데 인생 2막 목표는?

잘 쉬고 재미있게 보냈다. 마지막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축구 관련 업무라고 생각했다. 준비가 되고 결정을 하는 것과, 그 반대는 다르다고 생각을 해 앞으로 P급 라이선스도 들어가고, 테크니컬 디렉터 교육도 받고 있다. 끈을 놓지 않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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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꿈을 말해주시고, 위기의 전북과 한국축구에 대해서 말해달라.

뒤에서 전북을 보며 안타깝게 느꼈다. 지금 김두현 감독이 들어가서 잘 해낼 거라고 본다. 그 전에 있던 감독의 역량이 아쉬웠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에게 물어봐도 지도력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전북에 있어본 사람이 와야 한다고 느꼈다. 김두현 감독이 왔다고 들었을 때 환영했다.

국가대표도 팬들은 기다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염기훈 감독이 자진사퇴를 하면서 팬들의 역량이 너무 커버린 세상이 왔다. 팬들이 더 이상 못 기다려준 것 같지만, 그러면 누가 와도 팬들이 나가라고 하면 지도자는 그냥 나가야 한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팬들의 수준은 상당히 올라갔지만 지도자가 선임됐을 때 약속을 지키고 시간을 지켜 보시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대표팀은 당장 임시 감독이 지휘를 하신다. 김도훈 임시 감독이 새로운 선수가 많이 뽑혔다. 그 선수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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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분들에게 이야기.

다 읽어봤는데 책이 재미가 있더라. 축구를 하면서 수많은 선택을 했다. 잘못된 선택이 나오더라도 내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느낀 게 많다. 독자들도 그런 것을 보면서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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