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가가 지속해서 오르고 화폐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이 계속되면서 세계 각국의 금리 인하 기대도 가물가물해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지난 10일 치러진 22대 총선에서도 이 물가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바 있는데요. 그 중심에는 최근 가격이 폭등한 사과와 대파 같은 농산물이 있었습니다.
이들 농산물 물가에 집중한 기사는 그동안 많이 보도됐으니 오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국내 물가 상황을 살펴보고 농산물 물가도 짚어보려고 합니다.
통상 물가 기사는 물가가 발표된 그 시점에 가격이 크게 오른 품목을 중심으로, 돋보기를 들이대고 핀포인트 하는 방식으로 많이 쓰여지는데요. 시간과 품목의 범위를 좀 넓혀서 물가 전반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금(金)사과와 대파는 억울하냐? 안 억울하냐?”고 물으신다면…
물가 영향이 큰 임대료와 석유류 가격, 휴대전화료 등이 안정된 상황에서 과일과 채소를 비롯한 먹거리가 최근의 물가 불안을 주도한 것이 엄연한 사실인지라 억울하다고는 말 못 할 듯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정부는 이번 ‘금사과 사태’를 이상기후가 이미 상수가 된 상황에서 국내의 농업이 이런 변화에 제대로 대응 못 할 정도로 낙후된 것이 아닌지를, 냉정하게 돌아보는 계기로도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물가안정 사과’ 스티커가 붙은 사과가 쌓여 있는 모습.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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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물가, 해외에 비하면 ‘선방’
물가가 치솟아 힘들다고들 합니다만, 최근 수년 동안 한국의 물가 상승률은 해외에 비하면 그래도 준수한 편입니다.
매달 나오는 소비자물가 지수는 보통 전년 동월, 그러니까 1년 전 같은 달과 비교한 지수 상승률을 중심으로 발표가 되는데요.
월간 대신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놓고 보면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다른 나라보다 별로 높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가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방아쇠를 당기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물가 상승률은 2020년 1.4%에서 2021년 4.0%, 2022년 9.5%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2023년에는 다소 떨어졌지만 6.9%로 여전히 높은 상승률이었습니다.
반면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2020년 0.5%, 2021년 2.5%, 2022년 5.1%, 2023년 3.6% 수준이었습니다.
해외 주요국 중에서는 2022, 2023년에 2.5%, 3.2%가 오른 일본이나 2.0%, 0.2% 상승한 중국 정도를 제외하면 상승 폭이 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료: 통계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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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중치 1~3위 품목, 3년 동안 2~4% 안팎 올라
이런 물가 상승률은 아무래도 굵직한 물가 품목들이 크게 오르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소비자물가는 전체 458개 품목으로 산정되는데요. 이들 품목에는 서로 다른 ‘가중치’가 적용됩니다.
1년에 한두 번 살까 말까 한 품목과 매일 소비하는 품목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합계 1000의 가중치를 458개 품목에 나눠 적용해 소비자물가를 산정하는 것인데요.
458개 품목에서 가중치가 가장 높은 것은 전세(54.2)와 월세(44.9) 입니다. 전월세 두 항목이 거의 10%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농산물 ‘파’는 가중치가 0.9에 그칩니다)
전월세를 포함하는 물가 항목인 ‘집세’는 2020년 100에서(현재의 소비자물가 지수는 2020년 100을 기준으로 놓고 산정합니다) 지난해 103.75로 오르는데 그쳤습니다. 물가 가중치 1, 2위 품목의 물가가 3년 동안 3.75% 오른 셈이네요.
부동산 경기 침체 속에 전월세 같은 집세가 사실상 물가가 대폭 오르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한국에서는 해외에서는 보기 힘든 전세라는 독특한 임대차 방식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데요. 최근 10년을 놓고 살펴봐도 집세는 전체 소비자물가에 큰 부담을 주진 않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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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중치 3위는 바로 29.8인 휴대전화료인데요. 파의 물가 가중치보다 33배가 높은 이 휴대전화료는 2020년 100에서 2023년 101.79로 3년 동안 겨우 1.79%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대기업 계열의 일부 통신사가 과점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이동통신 시장에서는 가격에 대한 정부의 입김이 상당합니다. 정부의 통신료 정책도 큰 폭의 물가 인상을 막아낸 한 요소인 것입니다.
● 기름값은 지난해 ‘마이너스’, 공공서비스도 꽁꽁 묶어
가중치가 큰 대표 품목에는 석유류 제품도 있습니다. 석유류 가운데 휘발유(24.1)와 경유(16.3)가 각기 4위와 7위 가중치 품목인데요.
석유류 가격은 조금 특이한 모습입니다. 2020년 100에서 201년 115.23으로 올랐다가 2022년에는 140.76까지 뛰었는데 2023년에는 125.12로 다시 떨어졌습니다.
2021년과 2022년에는 상당한 물가 부담을 줬지만, 지난해에는 오히려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한 물가상승률을 상당 폭 떨어뜨린 것입니다.
물론, 석유류 제품의 절대적인 가격 수준은 여전히 높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석유류 가격은 사실 국제 유가와 연동되기 때문에 정부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외래진료비(가중치 20.5), 시내버스료(가중치 6.8), 택시료(가중치 3.2) 등을 더해서 가중치가 120.0에 이르는 공공서비스도 2020년 100에서 2023년 103.03으로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기 힘든 공공서비스 물가 상승률 역시 3년 동안 3.03%에 묶여 있으면서 물가 상승의 하방 요인으로 작용한 셈입니다.
지난해 8월 11일 오후 서울역 버스환승센터에 12일부터 버스 요금이 인상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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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가 전체로 봐도 이유 있는 금사과·대파 논란
이처럼 굵직한 품목의 가격은 크게 오르지 않았는데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22년 5%대 초반, 지난해 3%대 중반을 기록한데 이어 올해도 3%대에 머무르게 하는 주범은 무엇일까요?
금사과와 대파가 다시 등장할 대목인데요. “장 보기가 무섭다”라는 국민들의 아우성처럼, 실제로 먹거리 물가의 동향은 최근 수년 동안을 놓고 봐도 좋지 않습니다.
먹거리 중에서도 농산물, 그중에서도 과일과 채소. 그리고 가공식품이 문제인데요.
소비자물가 전체 지수는 2020년 100, 2021년 102.50, 2022년 107.72, 2023년 111.59로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과일 물가 지수는 100.00→111.25→118.17→129.54로 움직였고
채소 물가 지수도 100→104.25→110.27→115.58로 상승했습니다. 전체 물가보다 가파른 상승세가 뚜렷한 것인데요.
가공식품도 이 기간 100→ 102.08→110.02→117.55로 오르면서 물가 부담을 키웠습니다.
가중치가 0.1인 파스타면처럼 품목 하나하나의 가중치는 그리 높지 않지만, 품목이 많다 보니 모아놓으면 물가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가공식품(가중치 82.7)과 과일(가중치 14.6), 채소(가중치 14.3) 등의 먹거리가 최근 수년 동안 국민들의 느낀 물가 부담의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먹거리 물가에 인건비와 전기요금 상승 등이 반영되는 외식 서비스(가중치가 138.0에 이릅니다)가 이 기간 100→102.81→110.71→117.38로 오른 것 역시 의식주 가운데 식(食)과 관련한 국민들의 물가 부담을 키운 요소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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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수입’ 압력 낮추려면 국내 농업 경쟁력 높여야
다시 금사과와 대파로 돌아와 보자면… 이번 과일과 채소 같은 농작물의 가격 급등에는 ‘이상기후에 따른 작황 부진’, ‘농촌 고령화에 따른 재배 면적 감소’라는 설명이 공식처럼 따라붙었습니다.
한해 동안 힘들게 농사지어서 가을에 한 번 수확하는 사과의 생산량이 지난해 30%나 급감한 것은 분명 봄철의 이상기후를 비롯한 기후적인 요인 때문이 맞습니다.
하지만 먹거리가 물가 전반에 부담을 주는 상황이 수년간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부는 냉정한 반성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금사과 사태에도 사과 수입 가능성에 선을 그은 농림축산식품부는 얼마 전 ‘과수산업 경쟁력 제고 대책’을 내놓았지만, 국민 눈에는 ‘이제서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 보입니다.
강원도를 신규 사과 산지로 육성하고 냉해·태풍·폭염 피해가 우려되는 과일 재배지에 재해 예방시설을 보급하는 한편 재해에 잘 버티고 보관성 높은 과일 품종을 보급하는 등의 대책이었는데요.
온난화로 사과를 비롯한 농작물 재배 지역이 북상한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다뤄지기 시작한 지도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기후라는 핵심 요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농업의 산업적 경쟁력을 키우는 노력이 전반적으로 미흡했기에 금사과 사태가 벌어진 다음에야 경쟁력 제고 대책이 나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와 농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과일, 채소로 먹거리 물가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얼마 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얘기한 것처럼 농산물 수입 확대에 대한 요구가 더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부 안팎에서는 올해도 과일, 채소 작황이 녹록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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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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