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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촉발한 美 대학가 표현의 자유 논란

조선일보 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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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촉발한 美 대학가 표현의 자유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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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 확산에 여론 충돌
클로딘 게이 하버드대 총장은 지난 5일 국회에서 '반유대주의'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듯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후 그는 학교 안팎에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로이터

클로딘 게이 하버드대 총장은 지난 5일 국회에서 '반유대주의'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듯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후 그는 학교 안팎에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로이터


미국 명문 하버드대에서 11일 밤늦게까지 비공개 이사회가 열렸다. 이사회는 취임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은 클로딘 게이(53) 총장의 거취 문제를 논의했다고 알려졌다. 게이 총장은 지난 5일 미 의회에서 캠퍼스 내 반(反)유대주의 확산에 대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아 왔다. 이후 유대인 고액 기부자 등의 압박이 거세졌지만, 이날 이사회는 논의 끝에 게이 총장을 여전히 지지한다며 재신임을 발표했다. 앞서 펜실베이니아대 엘리자베스 매길 총장은 같은 이유로 9일 사퇴했고, 샐리 콘블루스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도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지난달 7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한 후 미 대학에서 반(反)유대인과 반이슬람 여론이 충돌하는 가운데 학내 반유대주의 여론을 충분히 비난하지 않은 대학 총장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미국 내 유대인의 막강한 영향력·자금력에 따른 이런 기조는 표현의 자유의 수호자임을 자부해온 미 대학들의 기존 입장을 거스르는 것이다. 미 수정헌법 1조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는 실질적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증오 표현을 포함한 모든 발언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보장한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 언론, 사상의 다양성 등을 통해 미국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여겨져 왔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개전 후 대학을 중심으로 이는 반유대주의 대처를 둘러싼 혼돈은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용인할지, 나아가 ‘용인되는 발언’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합당한지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제로 지목된 총장들이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밝힌 것도 아니고, 학내 반유대주의 발언을 충분히 강력하게 비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퇴까지 내몰리는 상황이 과도하다는 의견도 많다.

이들 총장은 지난 5일 미 하원에서 “대학에서 번지는 반유대주의 혐오 발언은 대학 행동 강령에 어긋나지 않는가”라는 엘리스 스터파닉 공화당 의원의 질문을 받고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기에 빠졌다. 게이 총장은 당시 “하버드의 가치와 상충되지만 우리는 혐오스러운 견해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표현을 보장한다”고 답했다. 이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그동안 미 대학들이 고수해온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발언이 알려지고 나서 학교 일부 기부자들과 정치인·학생들은 그의 답변이 반유대주의를 사실상 조장한다며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비난이 거세지자 게이 총장은 교내 신문 ‘하버드 크림슨’을 통해 “죄송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라고 사과했다.

게이 총장은 물러섰지만, 하버드대 다수 교수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총장이 학내 여러 목소리 중 하나인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묵과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단 이유로 정치권이 사퇴 압박을 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하버드대 교수 686명은 11일 “학문의 자유에 대한 하버드의 약속과 상충하는 정치적 압력에 저항할 것을 가장 강력한 용어로 촉구한다. 외부의 이런 압력에 굴한다면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자유롭게 탐구하는 우리의 문화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이사회에 보냈다. 총장 사퇴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대학 내 반유대주의 발언 중엔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식의 혐오적 표현도 있었다고 알려졌다. 총장들은 5일 청문회에서 수정헌법 1조에 따른 표현의 자유 원칙은 ‘실질적 혹은 임박한 위해’가 명확할 경우에만 발언 등을 규제할 수 있어 사안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원칙론을 펼쳤다.


실제로 미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십자가를 불태우는 식의 적나라한 종교 혐오 행위, 인종·종교에 대한 위협적 발언 등도 수정헌법 1조에 따라 금지할 수 없다. 타인의 발언이 자신의 권위를 부당하게 침해했다고 여겨진다면 명예훼손 소송 등 별도의 법적 절차를 밟으면 된다. 다만 이들 총장을 비난하는 이들은 대학 내 반유대주의 발언이 유대인 학생들에게 ‘실질적 위협’을 느끼게 할 정도로,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반유대주의적 표현을 제대로 징계하지 않았다며 바로 사과한 총장과 일부 대학의 입장이 최근 몇 년 동안 대학에서 일어난 다른 사례와 상반된다는 논란도 있다. 미 대학가에선 최근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과 표현의 자유가 충돌하며 격론이 일어왔다. 특히 지난 몇 년 사이 확산해온 ‘PC주의’가 과도해져 발언 검열 수준으로 치닫자 대학들은 표현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서부 명문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 법학대학원에서 학생들이 보수 성향 판사를 야유해 발언을 중단시키자 학교는 “자신의 견해와 상반된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입을 막을 권리는 없다”는 입장문을 냈다.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지난 9일 블룸버그TV에 나와 최근 반유대주의 발언 논란에 대해 “대학들이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제임스 윌릭은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라고 내세우는 대학이 헌법에 따라 보호되는 발언을 한 학생이나 교직원을 처벌하겠다고 의회에 약속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그래픽=백형선

그래픽=백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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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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