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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 (월)

[스브스夜] '꼬꼬무'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그곳엔 한국인도 있었다"…'한국인 피폭 피해자'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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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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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1945년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히로시마 카운트다운'이라는 부제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사건을 조명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김형률 씨는 남들보다 왜소한 몸집에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며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로 자랐다.

형률 씨는 기침이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았고 수도 없이 재발된 폐렴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했지만 정확한 병명조차 알 수 없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특히 부모들은 생후 1년 6개월에 세상을 떠난 형률 씨의 일란성쌍둥이 동생을 떠올리며 마음은 더욱 타들어갔다.

형률 씨가 25살이 되던 1995년 부모님은 드디어 형률 씨의 병명을 알게 됐다. 면역글로불린 결핍증. 이는 치료법도 없고 합병증도 많아 생존율이 높지 않은 병으로 보통 30살 이전에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걱정을 자아냈다.

이에 형률 씨는 도서관을 다니며 자신의 병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어느 날 한 논문 속의 단어 하나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논문을 보고 모든 것이 자신 탓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모든 비극은 그의 어머니가 여섯 살이었던 1945년에 시작됐다.

1945년, 당시 여섯 살이던 형률 씨의 어머니 곡지 씨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경남 합천에서 살던 곡지 씨 가족은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시 히로시마에는 8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여러 가지 이유로 살아가고 있었다. 일본 야구계의 전설적인 선수인 장훈 선수의 가족도 그곳에 있었다.

자의로 타의로 히로시마로 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며 살기 위해 하루하루 온갖 핍박을 견뎌내야 했다.

재 2차 세계대전 중이던 당시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한 학자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독일이 우라늄을 모으고 있다며 이는 핵무기를 만들기 위함이며 그렇기에 미국이 먼저 선수를 치자는 것.

6년 동안 5,500만 명의 사상자를 낳은 2차 세계대전. 미국은 1945년 7월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이에 원자폭탄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했다.

히틀러 사망 이후 항복을 선언한 독일, 이에 반해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사상자가 점점 늘어가는 미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최후통첩을 했으나 일본은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 죽겠다며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결정을 한 미국은 폭격 지점을 두고 논의를 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고쿠라 세 곳으로 좁혀졌다.

기상관측을 위한 비행이 먼저 이뤄졌고 구름이 걷힌 히로시마가 첫 번째 폭격 지점으로 선택됐다. 무전을 받고 폴 대령은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싣고 히로시마로 향했다.

오전 8시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한 에놀라 게이는 인류 최초의 핵폭탄 리틀 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지상 550m에 도착했을 때 폭발이 예정된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데는 소요된 시간은 투하 후 단 42초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생존자들은 당시에 대해 "반짝해서 놀랐다. 연기 때문에 옆도 못 봤다. 불이 꺼진 것처럼 깜깜해지면서 천지도 안 보였다. 집에 파묻혀있다가 나와서 보니 사람들이 다 죽어있더라"라며 참혹했던 당시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폭격 지점의 500m 반경의 사람들은 전멸했으며 2~3km 떨어진 곳의 콘크리트 건물 안에 있던 사람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장훈 선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우리 누나 얼굴이 다 불타가지고 예쁜 얼굴이 다 사라졌다. 하루 정도밖에 못 살았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울고 약도 없고 의사도 없고 자기 딸이 죽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냐"라며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열, 폭풍, 화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원자폭탄이 악마의 무기라고 불리는 이유인 바로 방사능 피폭.

폭격 한 시간 후 갑자기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렸다. 갈증에 목이 마른 이들은 이 빗물을 받아먹었다.

무엇 때문에 비가 오는 건지도 모르고 목을 축인 사람들. 하지만 이는 원자 폭탄이 터지면서 생긴 잔해와 재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차가운 공기층과 만나 비가 되어 내린 것으로 그 안에는 방사능 물질이 가득했다.

방사능에 그대로 노출된 이들은 설사와 구토를 시작했고, 온몸에는 붉은 반점이 생겼다. 또한 급격한 탈모가 진행됐고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도 있었다.

생존자 대부분 방사능에 피폭된 것. 하지만 이들을 치료해 줄 병원도 없고 임시로 설치된 임시 진료소도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진료소에 갔다가 그냥 돌아오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은 민간요법으로 연명했으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사망자만 늘어갔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아지는 하루하루.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 중 사망자는 3만 5천여 명에 달했다.

폭격 한 달 뒤 미국 정보는 현지로 들어와 폭격의 결과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기록하기 위한 영상을 촬영했다.

눈 뜨고 보지 못할 참혹한 모습이 그대로 담긴 영상은 수십 년 동안 감춰져 있었다. 그리고 이는 1980년대에 가서 처음 공개됐다.

미국의 공식 입장은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방사능 피해자는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게 은밀하게 방사능 노출에 따른 피해에 대해 은밀히 연구를 진행했고, 피폭 피해자들을 실험체 정도로 생각했다.

미국은 히로시마 폭격 3일 후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했고, 그제야 일본은 천황이 나서 패망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끝까지 항복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으며 식민지에 저질러 온 만행에 대해서도 어떤 사과나 반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패망으로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됐고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이에 히로시마, 나사가키 생존자들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에도 피폭의 영향으로 한여름에도 감기를 달고 살았고 원인 모를 피부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귀국 10년 후 곡지 씨의 어머니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곡지 씨도 피부병을 앓았고 허리에는 원인 모를 종양이 생겨 이를 제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곡지 씨는 원폭 피해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원폭 피해자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았고, 이에 피해자들은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피해 사실에 대해 침묵했다.

곡지 씨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쌍둥이 형제들 중 동생을 먼저 보내고 병에 시달리는 형률 씨를 보며 본인도 아들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피해 사실을 처음 밝히게 됐다.

2002년 3월, 33살이 된 형률 씨는 큰 결심을 했다. 자신처럼 선천적 질병으로 평생 병마와 싸우는 원폭 2세들을 위해 최초로 자신이 원폭 2세임을 고백한 것이다.

서울, 합천, 부산, 일본까지 자신과 같은 원폭 2세들을 찾아다니며 원폭 피해 사례에 대해 수집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원폭 피해로 유산, 기형아, 장애아 출산 사례가 많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형률 씨와 그의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률 씨의 노력덕에 용기를 낸 원폭 2세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형률 씨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도쿄 출장을 다녀온 후 호흡 곤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결국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곡지 씨 부부는 쌍둥이 형제를 모두 자신들보다 먼저 떠나보낸 것이었다.

현재 치매가 시작된 곡지 씨는 말과 기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해맑게 웃기만 하는 곡지 씨. 방송은 그의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면 부디 아픈 기억들이 먼저 지워지길 빌었다.

일본은 1957년부터 피폭 피해자들에게 건강수첩을 교부하며 무료 건강검진과 치료비를 지원해 줬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은 지원받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이 되어서야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도 건강수첩이 교부되었다. 수첩을 받기까지 60년이 걸린 것. 그런데 이는 우리 정부가 자국민들을 위해 싸워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들이 직접 일본 정부에 개인적 소송을 걸어 따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피폭 1세대에만 지원이 제한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부디 피해자만 있고 책임지는 이들은 없는 쟁이 끝나기를, 또한 이 세상의 아이들만큼이라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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